왜 고난을 당하면 기뻐하나?
고난은 연단이기 때문에
고난은 영광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때문에
이 땅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남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길을 떠나 세상으로 가기는 쉽습니다. 그래서 시대 시대마다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고 남는 사람은 소수이고 믿음의 길을 떠나 넓은 세상으로 가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났던 초대교회 때도 믿음의 길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으로 떠나가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런 자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고백합니다. 빌3:18입니다.
[빌 3:18]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빌 3:19]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리스도를 떠나 세상으로 가기는 참 쉽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타락한 육신의 본능을 따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본능을 따르는 길이기 때문에 쉽습니다. 내 욕심을 채우는 길이며 나의 안위를 위하는 길입니다. 한마디로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길인 것이죠. 그래서 세상의 길로 가기가 쉬운 것이죠.
그러나 여러분 그 길은 멸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것이 생명이고 가장 안전한 것이고 가장 행복한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남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남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남지 못하는 이유도 이 고난 때문이죠.
초대교회 때는 직접적인 고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천히 여기고 조롱을 당하고 좋은 직업을 갖기도 어렵고 재산을 빼앗기기도하고 매를 맞고 옥에 갇히기도하고 죽임을 당하기 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피를 먹는 자들이다, 근친상간을 하는 자들이다 등등 여러 루머들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남는 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죠.
오늘날에도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크고 작은 여러 고난이 있습니다. 이 음란한 세상에서 끊임없이 육신의 정욕과 싸우며 자신의 성결을 지켜야 합니다. 거짓과 불의가 관례처럼 자리잡힌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정직을 자신의 목숨처럼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아무리 무시하고 조롱하고 욕을 먹어도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계속해서 해나가야 합니다. 살림이 아무리 쪼들리더라도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온전한 예물을 올려드리며, 피곤하고 어렵더라도 예배의 자리를 신실히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 길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필수 과정과 같은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이 필수인 것일 까요? 그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요15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나에게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래, 이 세상에서 내가 너희를 택하여 불러냈어, 세상이 나를 미워했기 때문에 너희도 미워할 거야, 그러니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나를 잘 따라 와라 이런 식으로 말씀합니다. 그래서 오늘 베드로사도도 본문 12절에 보시면
벧전 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이 세상에서 고난받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는 것이죠. 오히려 베드로사도는 너희가 고난을 당하면 기뻐하라 라고 말합니다. 13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14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16절에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고난을 받으면 “할렐루야!!” 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위에 상사가 불의를 져지르라고 압박을 합니다. 그때 거부하고 절차대로 정직하게 일처리를 했어요. 그 일로 상사에게 찍혀서 승진 명단에서 빠지고 여러모로 불이익을 당합니다. 그때 어떻게 하라구요? 할렐루야!! 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전도지를 들고 나가서 전도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욕을 하고 막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할렐루야!! 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음식점을 하는데, 때르릉 전화가 옵니다. 요번 일요일 점심때 70인분 예약 좀 할께요. 합니다. 그때 죄송합니다. 주일은 쉽니다. 하는 것이죠. 예수님을 따르다가 물질적인 큰 손해를 보았을 때, 도리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따르다가 고난을 당하면 기뻐하라는 것일까요?
그 고난은 하나님이 나를 연단시키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쇠붙이를 단단하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예 불구덩에 집어넣죠. 그리고 빼서 망치로 두들깁니다. 이런 과정을 여러 번 거치면 그 쇠는 아주 딴딴해지죠. 고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닥치는 고난은요 단 하나도 아무 이유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그 고난 속에는 하나님이 뜻이 다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이 우리에게 닥쳤을 때, 반드시 하나님께 엎드려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도를 따라서 그 고난을 극복해나가야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더욱 견고케 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연단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참 신실한 자였습니다. 그는 그 신실함으로 장군이 되어서 많은 대적을 물리칩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큰 고난이 닥칩니다. 그것은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죠. 아무 죄가 없는 다윗은 왕궁에서 쫓겨나오고 늘 사울의 칼을 피해다니는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맙니다. 이 고난의 시기는 다윗에게는 정말 어려운 시기였죠. 10년이나 사울을 피해 쫓겨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 시련은 다윗을 더욱 견고케 하는 하나님의 연단의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10년동안 쫓겨다니면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철저히 체험합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들이 있었지만 자기가 사울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고 사울에게 손을 대지 않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시련을 통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자로 더욱 성숙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훗날 왕이 되어서도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잘 경외하며 나라를 잘 다스리는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 고난은 우리를 온전한 자로 연단시키는 하나님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사도가 오늘 본문 12절에 말씀하죠.
벧전 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시험이라는 것이죠. 불시험은 아주 힘든 시련, 고난 그런 것이죠. 그런데 그 불시험은 바로 하나님이 연단시키려고 보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닥쳤을 때, 아 하나님이 나를 온전케 하시려고 하시는 구나하고 도리어 할렐루야를 외치며 믿음으로 고난의 터널을 계속 걸어 나가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겪고 있는 분이계십니까? 그렇다면 이 시련은 나를 연단시키려고 하나님이 보내신 고난임을 인식하십시오. 그리고 철저히 하나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때, 여러분은 어느새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그 고난의 터널을 통과할 때에는 여러분은 더욱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있는 것이죠.
마치 욥이 모든 고난을 통과하고 고백했던 것처럼
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오늘 여러분이 겪고 있는 고난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보낸 것임을 믿으세요. 그리고 도리어 기뻐하세요. 믿음으로 이 고난을 통과할 때 여러분은 더욱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고난을 당하면 기뻐하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난이 우리에게 영광을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13절에 보시면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라고 되어있습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고난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받는 이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것이죠. 요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지금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와 고난을 같이 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난은 나에게 영광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고난받으셨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이 이기셨고 하늘에 영광가운데 계시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는 이 세상에 심판주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모든 천군천사를 대동하시고 이 세상 모든 인간을 심판하러 오시는 것입니다. 그때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고난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고난을 받으면 기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벧전 4: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벧전 4: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하나님의 심판이요 17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죠. 그런데 고전3:16에 그 성전이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임을을 말씀합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성도들부터 시작된다는 것이죠.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시행됨을 분명히 말하는 것입니다. 의인인 성도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면 악인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17절 다시 보시면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악인들에게 반드시 무서운 심판이 임하여 그들은 멸망 받을 수 밖에 없음을 분명히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고난을 받은 자들의 모든 신원을 풀어줄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 죄없이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았던 그 억울함의 눈물을 우리 하나님께서 다 씻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 까요? 이것은 죄의 심판이 아니죠. 18절에 의인이라고 말하잖아요. 성도들은 예수님의 피로 모든 죄를 씻은 의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죄의 심판일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럼 무슨 심판일까요? 예 상급에 관한 심판이죠. 이것은 눅19장에 므나의 비유에서 나오죠. 어떤 주인이 먼 타국으로 잠시 떠나면서 종10명을 불러서 각 사람에게 1므나씩을 나누어주죠. 나중에 주인이 돌아오는데, 어떤 종은 한 므나로 10므나를 남기고 어떤 종은 5므나를 남기죠. 어떤 종은 한므나도 남기지 못한 종도 있었습니다. 그때 왕이 상을 주는데 상에 차이가 있습니다. 10므나 남기자는 10고을 차지하라 하고 5므나를 남긴 자에게는 5고을을 차지하라고 합니다. 한므나도 남기지 못한 종은 악한 종이라고 꾸짖고 한므나 마저 빼앗아서 10므나를 남긴자에게 주라고 명합니다.
이런 상급의 심판이 성도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도가 이 땅에서 주를 따르다가 당하는 고난이요 성도들에게 훗날 큰 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땅에서 주를 위해 고난을 받을 때 도리어 기뻐하고 즐거워 해야하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가평에 와서 개척예배를 드려야 해서 손님들을 초대해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예배 끝나고 식사대접을 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설렁탕 집인가 음식점에 가서 주인에게 그랬습니다. 제가 몇일 뒤에 100명정도 와서 밥을 먹을 거니까 밥을 미리 준비해주세요 그랬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주인이요, 아주 좋아하는 것입니다. 왜 좋아하는 것일 까요? 100명 먹을 것을 준비하려면 얼마나 힘듭니까? 반찬도 만들어야 하고 국도 만들어야 하고 당일날 100명이 한꺼번에 몰리면 그 수발 다들어야 하고 설거지도 다 해야 하는데---
왜 좋아하는 것이죠? 예 그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받기 때문이죠.
그런데요 여러분 그 주인은 그 보상을 못 받을 수있어요. 왜냐하면 제가 나쁜 마음먹고 음식먹고 돈 지불하지 않고 날라 버릴 수 있는 것이죠. 그런 경우가 이 세상에서는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요 하나님 나라에서는 절대 그런 부도 같은 것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주를 위하여 고난을 받았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상을 잃지 않게 하십니다. 마10:42에 제자에게 냉수 한그릇 떠준 것도 상을 잃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너무 기쁘고 좋은 것은 이 땅에서는 그 보상이란 것이 보잘 것 없잖아요. 100그릇 팔아도 한 그릇에 만원 잡으면 100만원이고 거기서 인건비 제하고 재료값제하고 이것 저것 다 제하면 많아야 얼마나 보상을 받겠습니까? 그런데요. 여러분 하늘에 보상은 100배 천배 만배 보상이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땅에서 우리가 받는 고난은 훗날 우리가 그 고난으로 받게될 상에 비하면 그 고난은 너무너무 작은 것이라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주를 위하여 열심히 사십시오. 고난을 받으면 할렐루야!! 하고 기뻐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고난을 당하면 왜 기뻐하냐면요 한번 따라합시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나를 연단시키고 고난이 나에게 큰 상급을 받게 해주는 것이라서 기뻐하지만요, 그것보다 더 기쁘고 영광스러운 것은 내가 받는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이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한 십자가의 고난은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데 기초석과 같은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완전히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 것이 아니죠.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저 가야 하고 하나님 나라는 완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이 바로 성도들의 헌신과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13절에 성도들이 받는 고난을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고난이었죠. 성도들의 고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19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이 말씀은 성도들의 고난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첫 번째 순교자 요한의 형제 야고보, 야고보는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다가 헤롯의 칼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 야고보의 순교는 다른 제자들에게 큰 믿음의 도전을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은 스데반의 죽음도 교회의 불씨를 사방에 퍼뜨리며 사울을 바울되게 하는 씨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주를 위해 당한 고난은 수많은 성도들에게 큰 도전을 주었고 그가 죽는 그 순간까지 충성한 것은 죽도록 충성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오늘날에도 여전히 주고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성도들의 수많은 고난의 피로 얼룩져있는데, 그 모든 고난들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 가는 귀한 재료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귀한 도구로 쓰임받는 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주를 따르다가 고난이 왔을 때, 나의 이 고난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도리어 기뻐하시고 끝까지 충성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신실한 그리스도인 누구누구 라는 말을 듣는 사람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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