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강의

<2020.8.30 주일오전예배설교문> 선한양심을 따르라 (벧전3:13-22)

박선준목사 2020. 8. 31. 03:57

선한 양심이 외치는 소리는?

하나님 뜻대로 살라 

복음을 전파하라 (열매가 없어도 낙심하지 말라)

 

여러분 살면서 양심에 가책을 느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양심의 가책은 내가 잘못한 것을 깨달았을 때 마음에서 울리는 소리죠. 그 양심의 소리가 울릴 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양심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양심의 소리를 모른 척하고 계속 나쁜 길로 가죠. 그런데 이 양심이요, 처음에는 좀 민감하게 잘 작동을 하는데, 자꾸 양심을 무시하고 나쁜 길로 가면, 양심이 잘 작동을 하지 않아요, 고장나 버립니다. 이것을 양심이 무뎌진다고 하죠. 이 양심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만 주신 선한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선한 양심이 처음 사람 아담 때에는 아주 활발하게 잘 작동을 하였는데, 아담이 죄를 범하면서 양심도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양심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아담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아담의 원죄 즉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 원죄로 말미암아 양심도 온전한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인데, 죄가운데 태어나는 인간에게는 그런 선한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죠. 어느 정도 기능을 하지만 그러나 온전한 것은 아니죠. 그런데 어느 정도 기능을 하는 양심마저도 이 죄악된 세상에서 살아가다 보면 점점 세상 때가 묻으면서 그 양심 조차도 제대로 기능을 못하고 돌처럼 굳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요 이 고장난 선한양심을 다시 살리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이 일을 위하여 세상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죠. 이 예수님이 못박힌 십자가가 나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바로 내가 지은 죄때문인 것을 깨닫게 되면 그 사람 속에 변화가 생겨납니다.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사람 양심에 큰 가책이 일어납니다. 그동안 거의 죽어있었던 양심이 살아나서 펄펄 뛰는 것이죠. 이 양심에 가책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합니다. 지난날에 내 욕심대로 내 정욕대로 살았던 것을 회개하며 이제는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겠습니다 하고 결심을 하게 되죠.

이때 부터는 이 사람 안에 양심의 기능이 회복되어져 갑니다. 그런데 그 양심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분이 계신데 그 분이 누구냐면 바로 성령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돕는 일을 하십니다. 그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있는 양심을 깨우시는 것이죠. 그런데 성령께서 양심을 깨우실 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 물으십니다. 전에는 내가 선의 기준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좋으면 선한거고 안좋으면 안선한거고 그런 것이죠. 그런데 그 선의 기준이 바뀌어 버립니다. 선의 기준이 훨씬 더 높아진 것입니다. 그 선의 기준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이렇게 선의 기준이 바뀌면서 우리 안에 양심의 기능도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에게 새롭게 살아난 양심의 소리가 무엇이냐면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뜻대로 살라!!" 입니다.  우리는 그 선한 양심의 소리를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죠. 만약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때, 양심이 소리지르는 것이죠. 야 그것이 하나님 뜻야, 그것은 너의 이득을 위한 것이잖아, 그럴 때 자기의 이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복된 줄 믿습니다. 13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벧전 3: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여기서 선을 행한다 할 때 선은 단순히 좋은 것, 착한 것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바로 선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열심히 선을 행하는 자가 되야합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하고 뜻이 아니면 억만금을 주어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 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선을 행하면 13절에 보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이 말은 어느 누구도 해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이 세상에서 어떤 해도 당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너희가 행한 선이 단 하나도 헛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태6장에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행한 것이 하늘에 보화로 다 쌓인다는 것이죠. 그것은 어느 누구도 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이 이 땅에 보화를 쌓는 자들은 나중에 아무것도 건질 것이 없습니다. 다 썩어질 것이고 헛된 것일 뿐입니다. 공든 탑이 다 무너져 버리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열심히 선을 행한 자들이 쌓은 탑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럼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여러분의 보화가 하늘에 그대로 쌓일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선을 행할 때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도리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데, 도리어 세상으로부터 욕을 얻어먹거나 핍박을 당하거나 할 때 도리어 기뻐해라 오늘 본문 14절입니다.

벧전 3: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그러므로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말고 소동치말라)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고 했는데요, 그런데 조건이 무엇이죠? 예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입니다. 의는 하나님의 뜻이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르다가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왜 본문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다가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내가 받는 고난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4절을 다시 보면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말고 이 말은 그때 너희를 위협하고 두렵게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근심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세상에 나가서 예수님을 전하였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전한다고 여러분을 욕하고 소리를 지르며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 지나 가는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복음을 전하는 저를 멸시의 눈으로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을 멸시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근심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선한 양심을 가지고 순수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라면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 일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데 아주 중요한 재료로 하나님이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큰 창피를 당하고 내가 복음 전하는 것 때문에 도리어 사람들에게 교회에 대한 나쁜 이미지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교회에 큰 핍박의 불지는 않는가 그런 걱정이 들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도리어 합력하여 반드시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선을 이루게 되는지에 대해서 15절 말씀을 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전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그러니까 세상이 욕을 하고 매로 때리고 옥에 가두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들은 도리어 그것을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핍박의 상황에서도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은 그런 그리스도인에 대한 궁금함을 품게 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저들에게는 무엇이 있길래 저런 상황에서도 도리어 기뻐하며 또 복음을 전하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죠.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순수한 헌신과 순종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강퍅한 유대인들 앞에서 담대하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면서 그들의 죄를 정확하게 찌릅니다.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7: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7: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이런 말을 하자 유대인들이 막 화가 납니다. 만일 제가 스데반 옆에 있으면 스데반 형님 살살하세요. 지금 몹시 유대인들이 화나있습니다. 독기의 눈을 부릅뜬 유대인들에게 주눅이 들텐데요. 스데반은 아랑곳하지 않고 담대하게 하나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러자 54절보시면

7: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그때 스데반의 영적인 눈이 열리면서 하늘에 보좌가 보이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이 우편에 서신 것을 보게되는데, 스데반이 큰 소리로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더욱 흥분하여서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스데반을 돌로 쳐죽입니다. 이렇게해서 스데반은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교회가 박살이 나서 온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땅으로 흩어져 도망가 버립니다. 여기까지만 보면요, “!! 스데반이 복음을 강하게 전하므로 유대인들을 자극시켜서 자기만 죽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까지 박해를 받고 흩어져 버렸잖아!! 가만 있었으면 아무일도 없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스데반은요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스데반은 죽고 교회는 큰 박해를 받아 결과가 좋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스데반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너무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복음 전파로 인해 예루살렘교회 큰 핍박을 받아 유대와 사마리아 전국으로 교인들이 흩어져 가버리는데요. 그런데 흩어져 간 교인 어떻게 했겠어요. 예 복음을 전하는 것이죠.

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사마리아 지역은 유대인들이 가기를 꺼려하고 부정하게 여기는 지역입니다. 아무도 이곳에 복음 전할 생각을 하지 않았죠. 그런데 이곳으로 흩어져 간 교인들이 복음을 전파하면서 사마리아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고 사마리아 지역 곳곳마다 교회가 생겨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요, 또 한가지 스데반의 죽음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무엇이냐면 강퍅한 사울이라는 자를 회심시키는 복음의 씨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하늘의 영광을 보며 수많은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죽는데, 그 자리에 사울이 그 무리를 선동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죽는 것을 생생하게 두눈으로 본것이죠. 그것은 아마도 사울에게 예수를 믿는 자들은 도대체 어떤 자들이길래 죽으면서도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 거지 라는 의문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개할 때, 자신의 선동으로 스데반을 죽게 한 것에 대한 큰 회개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사울이 변하여 수많은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바울이 된 것이죠.

이렇게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도리어 복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데 중요하게 쓰임받기 때문이죠.

 

성도 안에 있는 선한 양심이 외치는 강력한 소리가 있는데요 그것이 무엇이냐면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 입니다.

복음 전파는 예수그리스도의 유언과 같은 명령입니다. 마지막 승천하기 전에 너희는 내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안에 살아난 선한 양심은 복음을 전파하라 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외면하면 안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아무 죄없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세상 죄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어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는 부활하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소식을 담대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이해하기가 어려운 구절이 나오는데, 19절에 보시면

벧전 3: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여기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냥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노아시대 때 성령으로 가셔서 세상에 있는 영혼들에게 노아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120여년 동안 방주를 지으며 성령의 감동가운데 세상 사람들에게 물의 재앙이 있을 것을 전하였지만 아무도 그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당시 세상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다 멸망하고 오직 구원얻은 사람들은 노아와 노아식구 8명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용기를 얻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서 복음을 증거할 때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여도 결코 낙심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노아가 성령의 인도가운데 끝까지 복음을 전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증거하는 예수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벧전 3: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끝까지 선한 양심에 따라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