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종의 삶은?
선을 행하라 (모든 사람공경, 권위에 순복)
부당한 고난을 받아도 인내하라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연결)
지난 시간에 모든 성도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약시대 때는 제사장은 특별한 계층이었습니다. 일반 성도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면 제사장을 통해서만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소는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신약에 들어와서는 모든 성도들이 다 거룩한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이제는 누구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부르면 바로 그곳이 하나님이 계신 성소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히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지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거룩한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예배의 선수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왜그러냐면 삶 전부가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드릴 때만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끝나고 집에 가도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직장에 가서 일할 때도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가까운 사람들과 놀러가도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삶 전부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로마서12장1절에
롬 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의 삶 전부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적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럼 성도들은 거룩한 제사장으로써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예배의 삶을 살까요?
그것을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살라!! 라고 말합니다.
벧전 2: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여기서 자유는 율법의 정죄에서의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자들입니다. 모든 죄가 사함을 받은 자로써 더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 죄를 정죄하는 것은 율법인데, 성도는 더이상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가령 성도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럼 율법은 “네 이웃에게 거짓증거하지 말라” 했는데, 너는 거짓말을 했으므로 너는 죄인이다 정죄합니다. 그 때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내미는 것이죠. 그럼 더 이상 율법은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죄값은 이미 예수그리스도께서 치루어 주셨기 때문인 것이죠. 성도는 예수그리스도로 율법의 정죄에서 자유를 얻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그 자유를 악을 가리는데 써서는 안되는 것이죠. 만약 나는 죄의 정죄에서 해방되었어, 그러니까 나는 마음껏 죄를 져질러도 돼~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그리스도를 비웃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런 방종을 져지를 수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의 정죄에서 자유를 얻은 성도는 도리어 이제는 하나님의 종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누가 억지로 시켜서 종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자기의 자원함으로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전에 추구하던 육체의 정욕을 이제는 따르지 않습니다. 육체의 정욕을 날마다 제어하는 삶을 삽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자유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자원하여서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도의 영적예배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의 삶인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종의 삶은 어떤 것인가요?
계속해서 선을 행하는 삶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선한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그것이 17절에 나와있죠. 16,17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벧전 2: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벧전 2: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공경한다는 것입니다. 공경한다는 것은 가격을 정하다. 존경하다 그런 의미인데,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 사람 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만나게 해주신 소중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들을 만날 때, 나에게 이득이 되면 소중히 여기고 이득될게 없으면 하찮게 여기는데, 절대로 그렇게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이웃을 우리는 존경의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을 선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대할 때, 우리를 악담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깨닫는 날에 모든 오해는 풀어지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12절에
벧전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차게대하고 여러분이 악을 행한다고 비난을 할 때, 그런 것에 일일이 변론할 것 없습니다. 계속해서 선을 행해나가십시오. 그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선행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말을 막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공경으로 대하지만 특별히 위에 통치자들을 공경할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권위에 대한 존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3절에 보시면
벧전 2:13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벧전 2:14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위에 있는 왕이나 총독 같은 권위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제도를 무시하고 통치자들의 권위를 무시하게 되면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게 되는 것이죠.
작은 예로 쓰레기를 버릴 때, 쓰레기 봉투에 넣어서 버리라고 군청에서 규정이 내려왔습니다. 그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도 그 규정을 존중하고 잘 따라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규정을 무시하고 까만 비닐봉지에 쓰레기를 무단으로 버리면,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만 욕을 먹는 것이 아니라, 교회다니는 사람이 저렇다고 하면서 교회가 욕을 먹고 더나아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버리게 되는 것이죠.
그리스도인들이 위에 권위에 존중하는 첫 번째 이유는 세상 모든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있고 법이 있고 통치자들이 있고 그런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 세우신 권위인 것입니다. 물론 국민들의 투표를 통해서 통치자가 뽑히고, 통치자는 자기 뜻대로 총독같은 권위자를 세워서 나라를 다스려나가는 것이죠. 그러나 그들이 뽑히고 세워지는 것에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인식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위에 권위에 철저히 순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 권위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복종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권위는 죄로 말미암아 불완전하며 불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만약 세상의 권위와 하나님의 말씀이 충돌이 되면 성도들은 당연히 세상 권위에 대항하며 하나님말씀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행전4장에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소식이 예루살렘에 급속도로 퍼져나가자 유대지도자들이 예수의 도를 전하지 못하게 합니다. 4:18,19
행 4: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행 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 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이후에도 사도들은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다가 모두가 순교의 길을 갑니다. 그것은 그들의 소명이기에 불의한 세상 권력이 그것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위가 우리의 신앙을 부인하도록 하면 우리는 목숨을 빼앗긴다고 해도 대항하며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심을 담대히 시인하며 그리스도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성도에게 하나님의 권위는 최종적인 것이며 그것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과 직접적으로 충돌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세상 권위에 적극적으로 순복함으로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세상 권위를 공경하다가 부당하게 고난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18절에 사환들아 하면서 사환과 주인의 관계를 말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벧전 2:18 사환(가정에 속한 하인)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사환은 주로 집에서 일하는 종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사환은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했습니다. 여기서 두려워함 은 하나님을 경외하다 할 때도 경외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종들은 주인을 대할 때, 깊은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대하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존경의 마음을 관용하는 주인 즉 친절하고 온유한 주인들에게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까다로운은 굽은, 삐뚤어진, 부정직한 그런 뜻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며 부정직하고 상황에 따라 말이 바뀌며 약자에 대해서 안하무인격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주인일지라도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그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까다로운 주인을 섬기다가 부당하게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은 주인에게 대들거나, 주인을 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인내해야 하며 참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19,20절에 나와있죠.
벧전 2: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벧전 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직장이나 사회에서 불의한 상사나 사장을 만나서 부당한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슬픔을 참고 인내해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불의한 상사에 대한 순종의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이 사울왕을 그렇게 대했죠. 사울왕이 다윗이 승승장구하자 다윗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나중에는 죽이려고 하죠. 다윗은 10년동안 사울왕을 피해 쫓겨다니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나 다윗이 사울을 계속해서 자기의 왕으로 대하는 것을 봅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와서 다윗의 부하가 이것은 하나님이 사울을 죽이라고 주신 기회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왕에게 손대는 것을 금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왕이기 때문에 자신이 손을 대선 안되는 것을 명확히 합니다. 이런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부당한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며 인내하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부당한 고난속에서도 인내하는 것이 하나님이 부르심임을 말씀합니다.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부당한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은 이것은 단순히 우리의 인내심이나 의지로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연결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부당한 핍박이나 고난에서도 그것을 넉넉히 견디어내고 도리어 그렇게 당하면서도 감사와 기쁨을 잃지 않는 것은 지금 내가 겪는 고난과 그리스도의 고난이 연결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22절부터 나와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무 죄가 없으시면서도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고난과 핍박속에서도 우리의 혈기를 따르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끝까지 십자가를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당하는 이 고난도 그리스도에 속한 고난이기에 넉넉히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한 제사장의 삶인 것입니다.
'설교 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8.30 주일오전예배설교문> 선한양심을 따르라 (벧전3:13-22) (0) | 2020.08.31 |
---|---|
<2020.8.23 주일오전예배설교문> 거룩한 제사장(벧전3:1-12) (0) | 2020.08.23 |
<2020.8.9주일오전예배설교문>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가라(벧전2:1-11) (0) | 2020.08.09 |
<2020.8.2주일오전예배설교문>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3-25) (0) | 2020.08.04 |
<2020.7.26주일오전예배설교문> 산 소망을 가진 자(벧전1:1-12) (0) | 2020.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