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일에 헌신하세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3개월째 계속되고 있는데요,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전쟁은 서로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상대를 죽여만 하는 것이죠. 전쟁은 사람의 생명을 무가치하게 여기게 만듭니다. 전쟁터에서는 사람이 죽는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일상입니다. 그래서 사람 죽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합니다. 사람을 많이 죽이면 도리어 상을 받는 것이죠.
생명존중이라는 생각은 사라지고 생명을 하찮게 여기게 되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도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모습이 나옵니다.
애굽왕 바로가 노예로 붙잡혀있는 이스라엘민족 사람들의 생명을 하찮게 여깁니다. 이스라엘민족이 애굽에 들어온지가 400년이 가까이 되었는데, 이스라엘민족은 애굽사람들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민족은 하나님이 택한 민족으로 하나님의 보호가 그들 위에 있었습니다. 비록 애굽사람들의 노예가 되어 고난의 시절을 보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스라엘민족의 숫자는 급격하게 늘어납니다. 이스라엘민족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아지자 애굽왕이 은근히 걱정이 됩니다. 이 민족의 숫자가 더 많아지면 통제하기가 어렵되고 결국 독립해서 나갈 수 있다는 불길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왕 바로는 이스라엘민족 인구 억제 정책을 핍니다. 이스라엘인의 숫자가 더이상 늘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나일강에 던져 무조건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애굽왕의 조치는 사람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죠. 자기의 이득을 사람의 생명보다 더 귀히 여기는 것이죠.
이런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사탄적인 생각입니다. 사탄은 생명을 하찮게 여깁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요10:10절에 이렇게 말씀하시죠.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둑은 자기 이득을 위해서 얼마든지 상대를 죽이는 존재이죠. 상대의 생명을 전혀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도둑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사람을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이득을 추구하는 분이 아니라 상대의 이득을 추구하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상대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풍성케 하기 위해서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분이십니다. 사탄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은 완전히 반대인 것이죠. 사탄의 생각은 오직 자기를 위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상대를 기꺼이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오직 상대의 유익을 위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위해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죠.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께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죽이고 멸하는 사탄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사탄에 속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사탄적 생각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이 희생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입니다. 바로왕이 자기의 안전을 위해서 이스라엘에 태어나는 남자아기를 다 죽이라고 한 것이 바로 그 사탄적 생각인 것이죠. 그런데 이런 사탄적 생각이 우리 모두에게도 뿌리깊게 내려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오직 나를 위하고 다른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타락한 본성이 있습니다. 나만 배부르면 됩니다. 다른 사람이 배고프고 헐벗는 것은 별 신경이 쓰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각자 나 중심적이고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가득한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탄을 따라가는 것이죠. 사탄이 왜 우리에게 온다구요, 오직 죽이고 멸하기 위함입니다. 사탄의 생각을 따라가면 그것은 결국 자기를 죽이고 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생각을 따라가는 자들이 되어야 해요. 나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죠. 상대를 위하여 기꺼이 나를 희생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내가 손해볼 것 같고 내가 죽을 것 같은데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왜 우리에게 오셨죠? 예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하게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따라가면요 우리의 삶이 더욱 풍성해지고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과 평화가 넘쳐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더욱 풍성한 생명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나만을 위하는 사탄적 생각을 버리고 상대를 위하는 예수님의 생각을 르는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사탄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의 생각을 따를 수 있을 까요?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고 상대방의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각기 자기 욕심을 채우고 자기 이득만을 위해 산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은 하나님의 주관하심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결국은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각을 따라사는 자가 결국은 끝까지 남고 그 사람이 최종 승리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추구하며 사는 자,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사는 자, 자기를 높이려고 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를 낮추는 자, 자기 목숨을 구하려하지 않고 기꺼이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자가 승리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된다구요? 예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악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관하심 아래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악인의 꾀가 잘되는 것 같고 승리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가 승리합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왕이 이제부터 태어나는 이스라엘의 남자아기를 모두 죽이라는 엄명을 내립니다. 이 명령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아기를 갖지 말라는 명령과 같은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겁이나서 아기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아기를 가졌다가 아들이 나오면 죽여야 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모든 부부들이 아기를 갖지 않으려고 하죠.
오늘이 어버이 날인데요, 부모에게 자식은 생명과 같은 귀중한 존재입니다. 부모가 나은 자식을 죽인다는 것은 마치 부모의 생명을 빼앗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을 하찮게 여기고 생명을 죽이는 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바로왕의 이런 잔혹한 명령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큰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바로왕의 사탄적 생각이 승리를 거두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죠.
1절에 보시면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죽음의 역사가 강력한 가운데 한 줄기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 줄기의 생명이 아주 위태롭습니다. 아기가 태어난 것이 발각이 되면 그 아기는 즉시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아기의 부모는 태어난 아기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다 했습니다. 여기서 잘생긴 이라는 표현은 원어로 토브라는 단어인데, 토브는 좋다 그런 뜻입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 1장에 보시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 과정에서 반복되어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빛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땅에 각종 씨가진 식물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늘의 해,달,별들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늘에 새를 날게 하시고 바다에 물고기를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땅에 짐승들과 인간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생명을 보시고 좋았더라 좋았더라 토브의 반복이죠. 이것은 마치 엄마가 자식을 낳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토브는 하나님이 자기가 만드신 세상을 보시고 세상을 사랑한다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부모가 아기를 낳고 아기를 보니까 너무 좋은 것입니다. 이 아기를 죽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아기를 3개월 동안 몰래 키웁니다. 다행히 3개월 동안에는 들키지 않고 아기를 잘 키울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기가 커가면서 더 이상 아기의 존재를 숨길 수 없는 것이죠. 만일 아기의 울음소리를 애굽사람이 들으면 아기만 죽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을 어긴 모든 가족의 생명이 위태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기 엄마는 아기를 버리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손에 아기를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엄마는 아기가 누울 수 있는 갈대 상자를 만들고 갈대상자에 나무의 진과 역청을 발라서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갈대상자를 나일 강가 갈대 사에 둡니다. 그런데 이 상자라는 단어는 원어로 테바라는 단어인데, 이 테바라는 단어는 창세기6,7장에서 노아의 방주에서만 사용됩니다. 이 상자 테바는 방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노앙의 방주는 망망대해에 정처없이 떠밀려 다니는 것이죠.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만을 의지할 뿐입니다. 아기를 갈대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흘러가도록 놔둔 것도 하나님의 보호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노아방주에 있던 자들이 새로운 시대를 연 것처럼, 이 상자 안에 있는 이 아기를 통해 하나님이 새시대를 열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갈대상자를 나일강 갈대 사이에 놔두었는데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아기의 누나였습니다. 4절에 보시면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멀리 선 것은 자기가 이 아기와 상관없는 자임을 나타내기 위한 거리입니다. 그러면서 아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는 적당한 거리인 것이죠.
아기의 누나가 얼마나 오랫동안 동생의 갈대상자를 지켜보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어떤 사람들이 갈대상자가 놓여있는 곳으로 옵니다. 누나는 숨죽이며 이것을 지켜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바로왕의 딸이 나일 강으로 목욕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바로왕은 누구입니까?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원수입니다. 그런데 그 원수의 딸이 아기에게로 가까이 오는 것이죠. 아기가 저들에게 발각되면 아기는 죽은 것과 같은 것이죠. 공주는 그녀의 시녀들과 나일 강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갈대상자를 먼저 본 사람은 시녀들이 아니라 공주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상황을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심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만약 공주보다 시녀들이 이 아기를 발견했다면 이 아기는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녀들은 절대로 국법을 어길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기가 귀엽다고 이 아기를 살려주면 자기들의 목이 달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기의 갈대상자를 발견한 사람은 공주였습니다. 공주는 갈대상자를 발견하고 자기 시녀를 보내어 갈대상자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5절에 상반절 공주와 함께 나일 강을 거닐던 시녀들과 공주가 갈대상자를 가지고 오라고 시킨 시녀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글 성경은 시녀 시녀 똑같지만 원어로 보면 다릅니다. 공주와 함께 거닐던 시녀들은 시녀들 중에서도 꽤 높은 자들로 우리나라로 치면 상궁 정도되는 자들이죠. 이들은 왕궁의 법도를 잘 알고 법도를 공주에게 가르키기도 하며 공주 보필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들에게 아기가 넘겨졌다면 아기는 죽는 것이죠. 그런데 공주가 갈대상자를 가지러 보낸 시녀는 그런 직위를 가진 시녀가 아니라 공주의 몸종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즉 궁중의 법도 보다는 공주의 의도를 더 중시여기고 공주를 따르는 심복인 것이죠. 이 몸종은 공주의 뜻에 복종할 뿐입니다.
이 시녀가 갈대상자를 가져와 상자를 열고 그 아기를 공주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죠. 아기가 공주에게 안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기는 공주 앞에서 크게 웁니다. 이것을 본 공주는 아기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생겨납니다. 그러면서 “이 아기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합니다. 이것을 멀리서 유심히 지켜보던 아기의 누나가 즉시 공주에게 달려옵니다. 이 누나의 즉시 적인 간섭은 다른 해로운 기운이 공주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연속적으로 아기를 위하는 상황으로 이어가는 것이죠. 아기의 누나는 공주에게 다가와 말합니다. “제가 공주님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젓을 먹이게 할까요? 합니다. 애굽인들은 히브리사람들을 하대하는데 이 누나의 제안은 적절한 제안인 것이죠. 그래서 공주는 누나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가서 데려오라고 합니다. 누나는 그 즉시 달려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옵니다. 공주는 아기의 어머니에게 ”이 아기를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그럼 내가 너에게 삯을 주겠다 합니다. 이렇게 해서 아기 엄마는 자기 자식을 안전한 환경 가운데서 젖을 먹이며 양육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아기가 어느 정도 자라자 아기를 공주에게로 데려가니 공주는 아기를 자기 아들로 삼고 그 이름을 모세라고 짓습니다.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세는 죽음을 모면하였을 뿐만아니라 애굽 왕궁에서 왕족으로 자라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입니다.
죽음의 역사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이죠. 나중에 이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서 죽음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은 애굽을 탈출하여 생명의 시대로 나아가게 됩니다.
결국 죽이는 사탄의 역사는 패하고 살리는 생명의 역사가 승리하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이 생명을 하찮게 여기고 자기 이득만을 추구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세상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우리의 온 힘을 쏟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생명을 살리는 일은 무엇일 까요? 그것은 이 세상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향해 가는 이 세상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사망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합니다.
고전 15: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을 삼키고 이기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사마 아래에 있었던 자들이지만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탄은 끊임없이 사람을 죽이고 멸망시키려 합니다. 우리는 이 사탄 궤계를 궤멸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사탄의 역사를 끊어버리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죠. 그것은 세상에 나가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는 생명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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