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
왜 세상은 이런 사람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들은 영원한 부활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는 사람이 때문에
다윗은 믿음으로 블레셋, 모압, 수리아, 에돔을 정복합니다. 사무엘은 오직 하나님의 의로 나라를 다스립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을 잃지 않았고 100세 때 90세의 아내에게서 아들을 얻습니다. 다니엘은 굶주린 사자 굴에 던져졌으나 전혀 해를 입지 않고 굴에서 나왔고, 사드락,메삭,아벳느고는 왕의 명령으로 불구덩이에 들어 갔지만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대적 하만이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칼을 들었지만 에스더의 믿음의 간구로 유대인들은 칼을 피하고 도리어 그 칼에 하만이 맞아 죽습니다. 보잘 것 없는 기드온은 강한 군사가 되어 삼백 명의 군사로 수많은 미디안 군대를 쳐부숩니다. 여호수아나 여러 사사들도 용감하게 이방나라를 이깁니다. 수넴여인은 믿음으로 엘리사선지자를 극진히 섬겼다가 죽은 아들을 부활로 받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몸이 잘리거나 칼날에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이나 염소 가죽으로 옷을 삼아 유리하고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로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을 헤메며 다녔습니다.
38절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왜 세상은 이런 사람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들은 영원한 부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겨자씨가 화분에 심겨졌습니다. 처음에 화분은 겨자씨가 자라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겨자씨가 점점 커지면서 화분은 겨자씨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겨자씨는 어떤 풀보다 커져서 나무가 되어 많은 새들이 깃드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화분은 겨자씨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죠.
이와같이 세상이 이런 사람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세상은 멸망 받을 세상이고 반면에 이런 사람은 영원한 부활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속에는 영원이라는 소망이 있기에 썩어질 세상이 그들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쓰시려고 부르십니다.
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그러자 예레미야가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기 전에는 말 못 하는 아이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자 그는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가 됩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예레미야를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가 입을 열어 하나님 말씀을 전하자 점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나중에는 왕을 비롯한 모든 백성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예레미야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의 입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멸망 받을 세상이었기에 영원한 하나님 말씀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죠. 예레미야는 땅도 있고 재산도 있고 그냥 세상에서 편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멸망 받을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가슴을 찢으며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40여년 동안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이런 예레미야의 말을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듣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레미야의 입을 막기 위해 매를 때리고 옥에 가두고 죽이려고 합니다.
왜 이스라엘은 예레미야를 박해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예레미야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가슴속에 생겨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멸망받을 이스라엘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죠.
결국 이스라엘은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bc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합니다.
저는 불신의 집안에 태어났습니다. 제사를 중시 여기는 집안입니다. 명절이 되면 모든 집안 사람들이 모여서 조상님들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할아버지가 제주가 되고 큰아버지, 아버지, 작은 아버지 식구들이 다 모여서 조상에게 절을 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했고 제사때가 되면 먹을 것도 많고 식구들도 많이 모여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른들은 늘 강조하는 것이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성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저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서 제 안에 부활소망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더 이상 집안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집안 사람들이 가는 길은 멸망의 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였습니다. 조상을 잘 섬겨서 조상님들이 주는 복을 받아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이 그들의 삶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나의 구주이심을 영접하자 내 안에 부활의 소망이 생겨났습니다. 전에는 썩어질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썩어질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더 이상 제사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고, 세상의 성공을 위해 달려갈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하나님만을 높였습니다. 그러자 집안 식구들의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할아버지, 큰아버지, 아버지, 사촌들까지 너는 왜 절을 안 하냐고 꾸중을 하고 너 그렇게 살면 망한다. 뭐 먹고 살래,,,, 여러 방법으로 공격을 하였습니다.
그런 핍박이 시작된 것은 그들이 저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부활 생명과 소망을 가지고 사는 저를 죄와 사망 아래에서 멸망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죠.
이렇게 부활의 소망이 생겨나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된 자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을 따르지 않으니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안에 영원한 부활생명이 있는 줄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박해를 받으면 “아 내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구나” 라고 여기면 됩니다.
그런데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오직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위해 사는 세상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은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바쁘게 돌아가는 것은 각자 자기 영광을 위함일 뿐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로 가득차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역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이런 사람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이런 사람을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너도 우리처럼 살아” 라고 압박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은 나로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제는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사는 자입니다.
이렇게 성도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때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습니다. 박해를 받을 때 성도는 그것을 피하거나 도망가서는 안 됩니다. 조금 더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부인하면, 그 대가는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선배들은 결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35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이 세상의 생명을 지푸라기같이 버렸습니다. 이들이 모든 고난을 극복한 것은 그들 마음에 부활의 소망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이 불확실하다면 낙심하여 세상으로 떠나가 버렸을 것입니다.
여러분 조금 더 오래 살겠다고, 좀 더 편안하게 살겠다고 주님을 부인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결코 지혜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이다음 주님 앞에 섰을 때 큰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믿음의 선배들처럼 사나 죽으나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은 같은데 결과가 크게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더니 높임을 받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천히 여기고 멸시를 받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33,34절은 높임을 받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였더니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가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36-38까지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는데 오히려 멸시와 천대를 받다가 생이 끝난 경우입니다.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온전히 헌신하였는데, 영광은커녕 조롱, 채찍질, 결박, 옥에 갇히고 돌에 맞고 톱으로 잘려서 죽고,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로 유리하며 다니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이렇게 결과가 차이나는 것을 보고 우리는 두 경우을 아주 크게 다른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둘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할 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엄밀히 믿음의 영향력은 두 번째 무리가 한 층 더 빛난다 할 수 있겠습니다.
스데반의 비참한 죽음은 강퍅한 사울을 깨뜨리고 회개시키는데 강력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전도 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고 교회를 세웠지만 그가 노후에 교회의 보살핌을 받으며 편안한 삶을 살다가 생을 마쳤다면 그의 영향력은 별볼일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늙어서도 끝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결국 로마 감옥에서 참수형을 당해 생애를 마침으로 그의 영향력은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약해지지 않고 수많은 성도들이 그를 통해 도전과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들로써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만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다가 나 굶어 죽으면 어떡하지? 가난하게 살면 어떡하지? 이름도 없이 무명으로 끝나면 어떡하지? 감옥에 갇히고 채찍에 맞고 죽임 당하면 어떡하지? 여러분 그런 것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주인이신 하나님이 빚어주신 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귀하게 쓰시려고 금그릇으로 만드셨으면 금그릇으로 살다가 가면 되는 것이고, 천하게 쓰려고 질그릇으로 만드셨으면 질그릇으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다만 금그릇이나 질그릇이나 오직 주인을 위할 뿐인 것입니다.
오직 주인을 위해 쓰임 받다가 가면 그것으로 된 것입니다. 너 금그릇이냐 질그릇이냐 그런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는 사람이 바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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