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강의

<주일오전설교> 하나님의 관심(창16:6-16)

박선준목사 2018. 11. 5. 10:23


여러분 혹시 투명인간 아십니까?

있기는 있는데, 주목 받지 못하는 위치에 있어서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사람을 일컬어 말하는 말이죠.

오늘 본문은 하갈이라는 여인이 나오는데 이 여인은 그런 투명인간과 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하갈 이 여인은 관심을 끌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미천한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의 신분은 여주인 사래의 몸종이었고 또 이 여인은 이스라엘사람도 아닌 이방족속 애굽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서 애굽으로 갔다가 그 때 딸려온 종으로 보여 집니다. 그러니까 애굽에서도 종으로 사고 팔리는 그런 비천한 신분이었던 것이죠.

어느 누구도 이 여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그저 여주인인 사래의 뒤치닥 거리만 할 뿐이죠. 빨래를 한다든가 설거지 음식을 만들고 집에서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맡아서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여인이 있는지 없는지 관심이 거의 없습니다. 여주인 사래의 그림자와 같은 존재일 뿐이죠.

그런데 이 미천한 여인이 어느 날 갑자기 관심 집중의 대상이 됩니다. 이 여인의 이름이 거론되어지고 또 이 여인에게 엄청난 축복이 주어집니다.

어떻게 이 여인은 하루아침에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일 까요?

그것은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의 씨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종 하갈이 여주인 사래의 남편의 씨를 받게 된 것은 사래의 불신에서 초래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자신에게서 아기가 생기지 않고, 또 점점 늙어서 이제는 여자로써의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까지 이르자, 사래는 자기 몸에서 아기가 낳을 것을 포기하고 자기 몸종을 통해 자기 자식을 가지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래의 몸에서 나올 자식이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래는 이 약속을 붙잡고 비록 자기 몸에 경수가 끊어졌을 지라도 참고 인내하며 기다렸어야 했는데, 사래는 조급함 속에 자기 몸종을 남편에게 줌으로 자식을 가지려 한 것입니다.

고대 시대 때는 이렇게 종을 통해 자식을 갖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30장에도 보시면 야곱의 아내 라헬이 자신이 아기를 낳지 못하자 자기의 몸종 빌하를 남편야곱에게 줌으로 그 빌하가 아기를 낳자 그 아기를 자기의 자식으로 삼는 것을 봅니다. 이와같이 사래도 자기 몸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줌으로 하갈이 임신을 하면 그 자식을 자기의 자식으로 취하려 한 것입니다. 마침내 하갈이 임신을 합니다.

하갈이 임신을 하자 갑자기 하갈이 아브라함 가정 내에서 관심 집중 대상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본처 사래와 결혼하여 수십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자기 자식을 가져 본적이 없었는데, 아 여종 하갈이 자기의 자식을 임신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연히 하갈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아마도 하갈에 대한 베려가 극심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래도 자식이 없어서 수십년 동안 마음 고생이 많았었는데, 드디어 자기 몸종이 아기를 가짐으로 그 아기를 자기 자식으로 생각하고 아마도 하갈에게 잘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하갈은 아무에게도 관심받지 못하고 섬김받지 못하던 미천한 여종 하갈이었는데, 이제 아기를 가짐으로 주인인 아브라함이 자기를 아내 대접을 하고, 여주인 사래도 자기에게 많은 베려를 해주는 것입니다. 하갈이 임신하는 동안 많은 관심과 베려가 하갈에게 집중되는데요, 그러는 동안 이 하갈의 마음 속에 교만한 마음이 생깁니다. 자기가 주인의 아기를 임신했으니, 나는 고귀한 존재야 라는 교만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하갈의 목이 뻗뻗해 집니다.

전에는 여주인 사래가 무엇을 시키면 그 즉시 복종했는데, 이제는 몸이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사래가 가서 물 좀 떠가지고와!! 그러는데 하갈이 제가 몸이 무거워져서요, 직접 떠서 먹으시죠, 점점 더 하갈이 교만해져서 아기를 갖지 못하는 사래를 멸시하기 까지 이릅니다.

종에게 멸시를 받은 여주인 사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남편 아브라함을 불러서 분통을 떠뜨립니다.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이렇게 된 것이 다 당신 잘못이다 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임신한 하갈을 사랑해줌으로 그 하갈이 기가 살아서 나를 멸시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께서 판단 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래가 하나님의 이름까지 들먹이면서 아브라함이 잘못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래가 이렇게 종에게 멸시를 받게 된 원인이 사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사래가 자식을 가지려는 욕심에 하나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남편에게 자기 몸종을 주었기 때문이죠.

이렇게 여러분 하나님 말씀대로 하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뭔가를 이루려고 하면 반드시 부작용이 일어나고 곤경에 빠지게 됩니다. 악인의 꾀를 따르는 자는 그 꾀에 자기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이 어렵더라도 앞이 잘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계속 뚜벅 뚜벅 걸어가는 것입니다.

사래가 남편에게 분통을 토해놓자 아브라함이 사래에게 당신의 여종이 당신 마음대로 하쇼 그럽니다. 그러자 사래가 하갈을 불러서 학대를 합니다. 매로 쳤든지 아마도 두들겨 팬 것 같습니다. 하갈은 사래를 피하여서 도망을 칩니다. 도망을 치는데 7절에 보시면 술 길 샘 곁에 있었다 했습니다. 이 술 길을 애굽으로 내려 가는 길에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하갈은 주인 사래를 피하여서 자기 고향 애굽으로 도망가려 했던 것이죠.

하갈의 신세가 갑자기 아주 비참해졌습니다. 빈텉털이 이고 주인에게서 도망쳐 나온 종, 이런 종은 죽여도 하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임신을 하고 있어서 이 아이를 어떻게 할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도 너무 멀고 험하고 여자의 단신으로 간다는 것은 너무도 위험한 것이죠. 또 고향에 간다고 해도 누가 하갈을 반가이 맞아 주겠습니까?

하갈은 술 길 샘곁에서 아마도 엉엉 통곡하며 울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사람들이 좀 알아준다고 높여준다고 그것 믿고 교만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의 칭찬과 인정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십시오. 그것은 실제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칭찬 인정은 마치 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져 버리는 것예요. 그 칭찬하는 사람이요 나중에는 저주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호하고 호산나 다위의 자손이여 하면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서 높였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체포되고 재판정에 서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칩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은 사람들이 칭찬해주고 왕으로 높이고 그런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그냥 피해 버리셨습니다. 동시에 사람들의 갖은 비방과 조롱 같은 것에 도요 전혀 요동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그렇게 되야합니다. 그럼 어떻게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 비방과 조롱 같은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을 까요? 그것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칭찬 인정 비방 조롱 따위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긴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따를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할 뿐인 것입니다.

우리도 여러분 교만이나 낙심 같은 것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게 되면, 자유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사람의 칭찬과 인정에 목을 매면 늘 압박과 부담속에 살게 됩니다. 칭찬해주면 금새 교만해지고 칭찬을 받지 못하면 금새 낙심하게 되죠.

하갈은 완전히 낙심에 빠져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래에게 관심을 받을 때는 교만하다가 한 순간에 그들에게 버림당하자 완전히 낙심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브라함과 사래는 한 순간에 하갈을 버렸지만, 그러나 여러분 하갈이 교만하든지 낙심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갈에게 관심을 갖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누구일 까요? 예 하나님이십니다.

7,8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하갈을 찾아오십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하갈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생전 처음 보는 분인데 자기의 이름을 아는 것입니다. 이름만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래의 여종인 것 까지 다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갈을 잘 알고 계십니다. 지금 하갈이 어떤 상태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다 아시는 것이죠.

하갈이 혼자 울부짖고 고통가운데 있을 때도 하나님은 그 고통의 소리를 다 듣고 계셨습니다. 11절 끝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하십니다.

하나님은 하갈에 관심이 많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갈이 비천한 신분이기에 관심도 없고, 또 교만한 하갈을 아브라함과 사래는 내 쳐버렸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하갈이 비천하거나 교만하거나 상관하지 않고 계속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죠. 왜 하나님은 하갈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일 까요?

그것은 하갈의 몸에 아브라함의 씨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으로 아브라함의 씨를 받은 하갈도 복을 받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나타나셔서 축복하십니다.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 약속은 하갈에게 큰 위로요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스마엘이 강성케 될 것을 예언하십니다. 그 예언이 10-12절 까지 나와있죠.

16: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6: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아브라함의 씨를 받은 하갈은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하갈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하갈 보다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그럴 까요? 예 우리 안에 아브라함의 씨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받은 씨는 하갈이 받은 아브라함의 육체의 씨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아브라함의 혈통의 씨 보다 우리가 받은 믿음의 씨는 훨씬 우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의 씨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씨는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 가운데 나오시는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 예수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아브라함의 씨 인 예수그리스도를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육체의 씨를 받은 하갈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씨를 받은 우리에게는 더 큰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씨를 받은 우리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갈과 우리가 공통된 점은 둘 다 비천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갈과 다를 바 없는 죄인이고 비천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씨가 우리에게 주어짐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의 집중 대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하갈을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서 하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와 같이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신음과 아픔 고통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풀어주시려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고통을 풀어주기 위해서 하갈에게 한 가지 명령합니다. 그것은 9절에 보시면 여주인 사래에게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갈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지키기가 어려운 것이죠.

사래에게 돌아가려면 하갈은 자기의 모든 자존심, 자기 주장, 자기의 다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가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엎드려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인생가운데 찾아 오시는 것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십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면 인생의 모든 문제는 다 풀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갈은 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여주인 사래에게 돌아갑니다. 돌아갔더니 어떻게 되었다는 것은 성경에 나타나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래가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사래는 돌아갔고 아브라함과 사래는 하갈을 다시 맞아 줍니다. 그래서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은 그 집에서 잘 자라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착하고 잘나서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아브라함의 약속의 씨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관심이 있고 나를 집중하고 계시고 나의 고통을 듣고 계시고 나의 인생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말씀 그대로 순종하시고 주님만 따라 가시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