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점점 악해져 가고 있고 타락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의 타락을 타락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을 도리어 자연스러운 것이고 억압에서 풀려난 자유라고 합리화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식을 한 후에, 정식 부부가 되어서 잠자리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순리입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그런 것은 구닥다리 윤리의식이 되어버렸습니다. 결혼을 하기 전에 남녀가 동침하는 것은 다반사입니다. 더나아가서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고도 남녀가 동침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깁니다. 예전 조선시대 때는 여자들은 자신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작은 칼, 은장도를 가지고 다녔다고 하던데, 이렇게 자신의 순결을 중요시 여기던 좋은 풍습이 다 사라진 것이죠. 성적으로 문란한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성적개방이라고 하고 성적자유라고 표현합니다. 성적타락을 죄로 여기지 않는 시대가 되버린 것입니다.
동성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남자와 남자가, 여자가 여자가 어떻게 같이 몸을 섞나 남자 며느리, 여자 사위 이게 말이 되나? 하고 황당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즘 동성애자를 남성과 여성과 똑같은 성으로 인정해 달라는 법이 계속 국회에 올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차별금지법 같은 법이죠. 만약 법적으로 동성애를 하나의 성으로 인정하게 되면, 초등학교부터 우리 아이들에게 동성애를 가르쳐야 하고 동성간의 성교육도 실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곧이어 동성결혼이 합법이 될 것입니다. 그럼 미래에는 아들이 아내라고 데리고 왔는데, 산적같은 남자를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지금은 말도 안된다고 하지만 그것이 법으로 인정이 되면 벌어질 상황입니다. 실제로 지금 동성애를 인정한 세계 여러나라에서 벌어지는 상황입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동성끼리 성관계를 맺는 것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것은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고 인간의 자유를 확대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도리어 동성애를 죄라 말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이죠.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세상에서 자신의 순결을 지키고, 세상의 흐름을 역행해서 살아가는 것을 어려운 것입니다. 초기에는 죄악된 세상을 거부하다가도 점점 세상에 동화되어 결국은 자기의 순결의 옷고름을 풀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한 번 풀리면 순식간에 죄악된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가게 됩니다. 그럼 나도 그런 것을 죄로 여기지 않고 죄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어져 버립니다. 타락한 것이죠.
오늘 본문에 노아시대 때도 온 세상이 죄로 타락될 때로 타락해 버렸습니다. 그 시대가 얼마나 타락을 했는지 온 땅이 부패하여 포악이 가득하다 했습니다.
창 6: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창 6: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땅에 사는 모든 인간들이 다 부패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적으로 타락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4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가 자식을 낳았다 하였는데,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세상의 음란에 넘어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를 죄로 여기지 않게 되어, 세상의 여자들과 한 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아무도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5절에 보시면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그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했습니다. 죄로 죄를 여기지 않는 악한 세상이 된 것이죠. 이런 세상에서 믿음의 순결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타락할대로 타락한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 있는 유일한 집안이 있었습니다. 그 집안은 바로 노아의 집안입니다. 노아의 아버지는 라멕이라는 사람인데, 라멕은 세상이 죄로 타락할 대로 타락하는 것을 보고 한탄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창5:29절에 보면 라멕은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고 지었다는 것입니다. 노아라는 뜻은 위안을 받다 그런 뜻입니다. 29절에 보시면 라멕이 이름을 노아라 지은 이유를 설명합니다.
창 5: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왜 땅을 저주하신 것일까요? 예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아담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데 땅도 저주를 받죠.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그래서 네 얼굴에 땀이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라”
가인도 동생 아벨을 쳐죽이자 하나님께서 가인을 저주 하시는데 땅의 저주이죠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이와같이 노아시대 때 인간의 죄가 세상에 가득하자 하나님이 땅을 저주하시죠. 그래서 사람들은 고된 노동을 해야 겨우 겨우 먹고 살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로 땅이 황폐화 된 것이 하나님의 저주인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땅의 황폐함이 인간의 죄로인한 하나님의 저주인 것을 라멕은 알았던 것입니다. 라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라멕은 온 세상이 죄로 타락한 것을 보고 한탄하고 슬퍼했던 것이죠. 그런데 라멕이 그런 암울한 현실 속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 이름을 노아 즉 안위, 위로를 받음이라고 지었습니다. 어떻게 라멕은 위안을 받은 것일까요? 이는 하나님이 노아를 통하여 이 세상을 구원하실 것을 라멕에게 알려 주신 것으로 보입니다. 라멕은 그런 하나님의 위로의 메시지를 받고 아들의 이름을 노아, 위로함이라고 지은 것이죠, 노아는 그 예언대로 타락한 세상에 물들지 않고 자기의 순결을 잘 지킵니다. 그래서 9절에 보시면
창 6: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악한 세상입니다. 이 죄악된 세상에서 악에 물들지 말고 노아처럼 자신의 순결을 잘 지켜나가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럼 노아는 어떻게 죄악된 세상에서 자기의 순결을 잘 지켜나간 것일까요?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것을 8절이 말합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위에 있었기에 노아는 타락한 세상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순결을 잘 지켜나간 것이죠. 그럼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노아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노아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부르셔서 아주 무서운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죄악된 세상이 멸망당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악한 자들이 형벌을 받지 않을 경우가 흔히 선한 사람들을 범죄하도록 유혹하는 경우가 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미래의 형벌에 대한 고발이 거룩한 사람의 마음을 억제하는 때에 보다 더 좋은 효력이 되게 하는 것이다. 노아는 방주를 짓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 소식은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짓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한다. 우리도 다른 곳에서 생수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이 보이면 뜨거운 여름날 힘들여서 우물을 파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물을 전혀 얻을 수 없다는 절망을 깨달을 때, 우리는 기꺼이 우물을 팔 것이다. 포크레인이 없으면 삽으로 팔 것이다. 왜냐하면 파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다.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것도 그와 같은 심정이다. 이것만이 살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노아에게 이 세상의 무서운 심판에 관한 말씀을 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 사실을 믿음을 받을 때, 반드시 방주를 짓게 된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그 소리는 그저 꿈같은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믿었던 노아는 자신의 삶 전부를 걸고 방주를 지었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에만 몰두할 뿐이었다. 그래서 눅16장에 보시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노아가 방주로 들어가는 날까지 세상은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갔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멸망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은 우리에 마지막날에 대한 아주 무서운 말씀을 전하신다. 세상의 심판이 있음을 전한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죄의 심판을 받아 지옥에 떨어질 것을 말씀한다. 그것은 둘째 사망이라 불못에 던져진다. 이런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를 주시는 것은 심판을 두려워하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다. 믿는 자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는 두려운 메시지이고 그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길 밖에 없기에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 분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 분을 뜻을 따라 살 뿐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다 미련한 것 뿐이고 그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계속해서 이 세상에 골몰할 뿐이다. 그러나 갑자기 심판이 임할 때 믿지 않는 자들은 멸말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물로 세상을 쓸어버릴 때, 그것은 땅을 정결하게 하시고 자는 의도를 암시하고 계신다. 마지막 날에 세상에 악한 것들은 모두가 사라져 버리고 이 세상에 거룩한 새하늘과 새 땅이 임하게 될 것이다.
18절에 하나님은 노아와 다시 약속을 하신다. 이것은 노아로 하여금 흔들리지 않고 방주를 짓게 하려 함이다. 방주를 지으려고 하면 이제 여러 어려움이 부딪치게 될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다시 힘을 내어 믿음으로 방주를 짓게 해나가기 위함이다. 우리가 노아와 같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게 하신다. 교회에 나와 예배를드리는 것도 교회에 올 때 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목사가 선포하는 말이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아멘으로 받고 확신을 얻으십시오. 그리고 이 성경을 우리게 주심으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할 수 있다. 평생에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확인하고 또 믿음으로 살아나가야 한다. 지금 약속을 믿고 가는 길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고 이 길이 진리의 길임을 확신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요약은 온 세상이 홍수로 멸망을 당할지라도 노아는 절대로 안전하게 보호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노아에의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진 것일까요? 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지혜인 줄 믿습니다. 자녀들이 어린 시절에 공부하기 싫어서 해야할 공부를 하지 않고 놉니다. 부모님 한테는 공부하러 간다고 해놓고서는 친구들과 영화보러 가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닙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좋고 재미있지만 그러나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는 해야할 공부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댓가를 치루게 되죠. 부모는 자녀의 시절을 지나온 자로써 어린 자녀들 보다 인생을 좀 더 멀리 볼 수 있죠. 부모는 자녀들에게 무엇이 좋은 것이고 해로운 것인지 자녀들 보다는 잘 압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자녀에게 지혜인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말은 틀릴 수 있습니다. 부모의 생각이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항상 옳습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처음이시고 나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처음부터 끝을 다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말씀은 항상 진리이며 옳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지혜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따라 사는 사람은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있습니다.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오늘 노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난 것은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사람들의 포악함이 가득하므로 땅과 함께 멸망할 것을 말씀하시고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14절서부터 보시면
창 6: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창 6:15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창 6:16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그런데 이 방주는 결코 돗단배와 같은 작은 배가 아닙니다. 길이가 삼백 규빗이라고 했는데, 1규빗이 50cm 정도 되니까 삼백 규빗이면 150m 너비는 오십 규빗 25m, 높이는 삼십 규빗 15m입니다. 이것은 노아 혼자서 만들 수 있는 배가 아니죠.
그리고 세상에 비 한방울 내리지 않는데 하나님은 홍수를 일으켜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마 어마하게 큰 배를 만들라고 하는 것은 노아로써는 순종하기 어려운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120년 후에 홍수로 멸망시킬 것을 말씀합니다.
노아는 120년 정도 방주를 만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미련해 보이고 따르기가 어려운 것이죠.
그런데 노아는 어떻게 했을 까요?
창 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120여년 동안 노아가 방주를 짓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노아를 미쳤다고 하고 너 뭐하냐고 놀리고 하며 세상 사람들은 무슨 멸망이 오냐고 하늘이 이렇게 맑은데 무슨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냐고 노아를 어리석다고 놀리고 비웃었습니다.
오늘날 제가 전도하러 나가면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전도하는 저를 아주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생각을 합니다. 죄의 심판이 있음을 말하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비웃고 조롱합니다.
심판 같은 것이 어디있냐고, 죽으면 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갈 뿐입니다.
노아도 사람들의 비난이나 조롱속에서도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순종합니다.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120여년이 지나고 드디어 노아의 방주가 완성이 됩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의 욕심을 따라서 살 뿐입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살아가는 것이죠.
하나님은 노아와노아식구들 그리고 각 종류의 짐승들을 방주에 두쌍씩 태웁니다. 노아와 노아식구들 각 종류의 동물들이 방주에 올라탔을 때, 갑자기 방주의 큰 문이 쾅하고 닫힙니다. 누가 닫은 것일까요? 예 하나님이 닫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는 40주야로 쉬지 않고 쏟아집니다. 하늘에 창이 열리고 땅에 깊음의 샘이 터지며 이 세상은 물바다가 되죠. 세상 모든 사람들은 모두 멸망하고 땅에 있는 모든 짐승들도 다 죽습니다. 물은 이 세상 모든 산을 다 덮어 버립니다. 이렇게해서 온 인류가운데 노아와 노아 식구들만 생존읋 하죠..
물은 150정도 땅에 넘쳤고 그리고 1년 정도 후에 노아는 방주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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