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2024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2024년이 아직도 새해 같은데, 어느새 묶은 해가 되어 버리네요. 우리 인생도 언젠가 마지막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이 멀지 않다는 것입니다. 2024년 마지막 주일이 어느새 다가왔던 것처럼 우리의 마지막 날도 어느새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수천년의 인류의 역사에서 100년도 안 되는 우리 인생은 마치 금방 피었다 지는 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 앞에 수많은 인생들이 잠깐 살다가 다 가버렸습니다. 지금 1920년생은 거의 다 사라졌고 1930년생도 찾아보기 힘들고 1940년생들이 다수의 노인이죠, 앞으로 30년만 지나면 1960년생은 찾아보기 힘들고 1970년생들이 다수의 노인층을 이룰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영원이라는 시간대에서 보면 찰나와 같습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죠.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살 것처럼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며 사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짧고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의 짧은 인생을 잘 보낼 수 있을까요?
범사에 기한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2절부터 그것을 주욱 설명하고 있습니다.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이 말씀은 모든 일에는 기한이 있어서 기한 내에 할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잘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심을 때 열심히 심고 뽑을 때 열심히 뽑고, 헐 때는 가차없이 헐고 세울 때는 공들여 세우고, 울 때는 슬프게 울고 웃을 때는 기쁘게 웃고, 사랑할 때도 있고 미워할 때도 있고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기에 기한 내에 할 일을 하는 것이 지혜인 것이죠. 그런데 기한은요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날 때 죽을 때, 심을 때 뽑을 때, 죽일 때 치료할 때, 헐 때 세울 때, 울 때 웃을 때, 찾을 때 잃을 때 등등 모든 일에 기한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모든 일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인생을 잘 살려면 모든 기한을 정하시는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지금은 무슨 일을 해야 하는 때입니까?”
지금은 웃어야 할 때입니까? 울어야 할 때입니까? 지금은 열심히 일해야 할 때입니까? 쉬어야 할 때입니까? 지금은 말해야 할 때입니까? 침묵해야 할 때입니까? 하고 하나님께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물으면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약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그러므로 우리의 짧은 인생을 잘 보내려면 모든 일에 기한을 정하시는 하나님과 늘 소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알맞은 일을 해나갈 수 있는 것이죠.
예수님은 늘 하나님과 소통하셨기에 때에 맞추어서 일을 해나가셨습니다.
요한복음 7: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요한복음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하시며 자기 때가 왔음을 아시고 십자가를 향해 기꺼이 걸어가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면 잘못된 삶을 살게 됩니다. 웃어야 할 때 울고, 울어야 할 때 웃고, 심어야 할 때 뽑고, 뽑아야 할 때 심는 잘못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으면 잘못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미래를 알 수 없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지으시되” 여러분 이 세상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은 참으로 넓고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만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 마음은 보이는 세상만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영원이라는 영역은 사람의 영역이 아닙니다. 오직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만이 영원하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영원은 하나님의 영역인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셔서 영원을 추구하게 하신 것입니다. 영원을 추구하게 되면 자연히 영원한 하나님을 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것은 하나님을 갈망하게 하여 하나님과 소통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한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미래를 알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단 한 치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적당한 기한을 알 수 없습니다. 심어야 할 때인지, 뽑아야 할 때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과거, 현재, 미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죠. 하나님에게는 모든 다 현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범사에 기한을 다 알고 계신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과 소통할 때 비로써 올바른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울 왕 때 블레셋 군인들이 침공해 오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하러 가기 전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가야 백성들이 안심을 하고 전쟁을 하는 것이죠. 그러나 제사장인 사무엘이 오기로 한 날이 되었는데 오지 않는 것입니다. 적군은 점점 가까이 오는데 사울의 마음이 점점 급해지는 것이죠. 이때 사울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더라면 하나님의 인도 가운데에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을 텐데, 사울이 하나님께 묻지 않고 급한 마음에 번제와 화목제물을 가져오라고 하여 자기가 번제물에 불을 질러 번제를 하나님께 드려 버립니다.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그때서야 사무엘이 옵니다.
사울이 조금만 참았으면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제사장 사무엘이 번제를 드려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을 텐데, 때를 참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번제를 드리므로 하나님께 범죄하고 저주를 받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합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하나님 말씀을 지켰더라면 왕의 왕위가 영원히 세워졌을 텐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므로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요,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대신 왕으로 삼으실 것이라” 합니다.
이렇게 여러분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으면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이 정하신 기한을 알지 못하고 잘못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늘 하나님께 물으십시오. 어떻게 할까요? 무엇을 해야 하나요? 언제 할까요? 하고 하나님께 물으면 반드시 하나님이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께 물을 때 우리는 지금이 무엇을 해야 할 때인지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알맞은 일을 하게 됩니다.
모든 일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과 늘 소통하여서 짧은 인생 보람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짧은 인생을 잘 보내려면 우리가 하는 일의 모든 전제는 하나님이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로지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제가 하나님이 아닌 나 자신이나 다른 것일 경우 그 일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아무리 큰 성과를 거두고 공로를 세운다고 하더라도 그 일의 전제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것은 헛된 것일 뿐입니다. 9절 같이 읽겠습니다.
9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무슨 이익이 있으랴? 이 질문은 아무 이익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려고 하는 질문입니다. 인간들이 하는 모든 수고가 아무 이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 인간들이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결과로 오늘날과 같은 눈부신 문명의 발달을 이룬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성경은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며 아무 이익이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일의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일의 전제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이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의 전제가 반드시 하나님일 때 그 일로 인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모든 일을 할 때 하나님을 위하여 하게 되면 무슨 이익을 얻게 될까요?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12,13절 읽읍시다.
12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일할 때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낙은 원어로 토브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좋다 그런 의미로 부족함이 없는 만족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심으로 인하여 참된 기쁨과 만족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이 세상을 통째로 다 넣어도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이 참된 만족을 얻으려면 그 마음에 영원하신 하나님이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 인간은 비로써 토브, 좋다라고 말하며 부족함이 없는 만족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에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은 전제가 하나님일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제가 아니라면 인간은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것으로 결코 낙을 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헛된 것을 추구할 뿐입니다. 그러나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모든 것의 전제가 하나님이면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하고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일을 함으로 얻게 되는 참된 이익인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바울도 고백하죠.
빌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시기를 바랍니다.
과학의 발전 속도가 훨씬 더 빨라지고 있습니다. 특히 인공지능인 AI가 발달 되면서 더욱 발전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이런 조그만 usb 안에 이런 두꺼운 책 수천권이 들어가고도 남습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핸드폰이나 컴퓨터에서 검색 기능이 사라질 것입니다. 인간이 검색할 필요가 없습니다. AI가 알아서 검색해 주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신발을 구입하고 싶다 하면 AI가 가장 적합한 것을 검색해서 아주 단 시간내에 나에게 보여주는 것이죠. 운전, 요리, 청소, 건강검진, 법률자문 등등 다 AI이가 알아서 다 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성경은 해 아래 새 것이 없음을 말씀합니다.
15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이 말씀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일어나는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벗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아무리 기발한 것을 만들어 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아래에 일어난 것일 뿐입니다. 14절에 보시면
14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하나님의 뜻만이 영원히 남아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인간들이 아무리 활보하더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 질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변하더라도 하나님의 뜻만이 영원히 남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행하시는 것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유대인들이 빌라도를 압박하여 예수님을 십자가 사형 선고를 내리고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가운데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는 구속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진 것이죠.
세상이 어떻게 변할찌라도 새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일어나는 것일 뿐임을 아시고 끝까지 인내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복된 삶이 될 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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