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하지 말라
예수님이 비판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시면 한글 성경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이렇게 되어있는데, 원래 원문은 “비판하지 말라”
가 앞에 나옵니다. “비판하지 말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입니다. 비판하지 말라를 예수님이 먼저 말씀하신 것은 그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비판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누군가가 악을 행하는데도 그냥 팔짱만 끼고 구경하고 있으라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마태복음23장에 보시면 예수님이 외식과 거짓된 삶을 사는 서기관, 바리새인과 같은 유대 지도자들을 아주 강하게 비판하십니다.
마태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외식하며 거짓되고 재물을 탐하는 유대 지도자들을 아주 강하게 비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악을 행하는 유대인들을 강하게 비판하시면서 왜 오늘 본문에서는 비판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예수님이 비판하지 말라고 한 1절에 같이 말씀하시죠.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이죠.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 너희도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비판을 하는 너희도 비판을 받을만한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2:13에 다른 사람 긍휼없이 심판하는 자는 그도 긍휼 없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야고보서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그럼 우리는 나도 비판을 받을까 두려워서 아무도 비판을 하지 말아야 겠네요. 그러나 예수님은 5절에 보시면 비판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라는 것은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해서 그것을 고치게 하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전에 무엇을 먼저 하라고 하시죠? 예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라는 것입니다. 들보는 집을 받치는 큰 기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큰 들보가 내 눈에 있다는 말은 나는 더 큰 허물과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더 큰 죄인이면서 다른 사람의 작은 악을 지적하고 정죄하는 것을 옳지 않다는 것이죠.
마태복음 23:24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하루살이 같이 작은 것은 부정하다 더럽다하며 걸러내어 거룩한 척하면서 정작 낙타같이 큰 것이 나오면 걸러내기는커녕 아무 말 안 하고 통째로 꿀꺽 삼켜버리는 도둑인 것이죠. 이런 들보를 가진 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런 자가 상대방의 티를 지적하고 그것을 고치라고 하면 그것은 너무도 가증스러운 것이고 상대방은 도리어 반항하고 강퍅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티를 빼기 전에 나의 들보를 빼야 합니다.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냐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미련한 자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은 잘 찾아내어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자기 자신의 허물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시죠.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이것이 죄로 타락한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나의 들보와 같은 큰 허물과 죄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티와 같은 죄를 보고 비판하고 정죄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비판은 잘못된 것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상대방의 작은 티는 아주 작은 빙산의 일각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왜 저런 허물을 져질렀는지 전후문맥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이죠. 그리고 나의 눈은 나의 들보로 가려져 있어서 상대의 죄를 공정하게 판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길을 가시는데,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 맹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합니다. 이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떠집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이 전에 앉아서 구걸하던 그 사람인가 하며 논쟁을 합니다. 그 사람이 맞아, 아니야 하고 논쟁을 하는 것이죠. 그러자 맹인이었던 사람이 자기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눈이 떠졌냐고 묻자, 예수라 하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맹인의 눈을 뜨게하신 예수님을 비판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눈을 고쳤기에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의 눈을 뜨게 한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칭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텐데, 그런 놀라운 기적은 하나도 눈에 안 들어오고 그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해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안식일에 맹인된 자의 눈을 고쳐주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이 단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한 면만 보고 정죄해 버리는 것이죠. 이것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을 져버리는 완전히 잘못된 비판을 한 것입니다.
왜 바리새인들은 이런 잘못된 비판을 하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의 눈을 시기라는 들보가 가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이 많은 병든 자의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시는 등 여러 기적을 일으키시고 말씀을 잘 가르치시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가는 것을 보고 시기심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의 허물을 들추어내어 쓰러뜨리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기, 질투라는 죄가 그들의 눈을 가리자 그들은 더 이상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안에도 이런 바리새인과 똑같은 시기, 질투와 같은 죄의 들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하는 자로써 설교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 금방 제 속에 시기, 질투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런 시기, 질투의 들보가 저의 마음을 덮고 있는 상태에서 저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상태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라는 들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기, 질투, 미움, 불의, 거짓, 탐욕, 음란, 교만, 고집, 용서하지 못함, 사랑하지 않음 등등의 죄의 들보를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올바른 비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비판하지 말라고 한 것은 선과 악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는 어느 누구보다도 항시 옳고 그름에 대한 정당한 판단을 해야 할 사람입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악한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항상 선을 따라가야 함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선과 악을 판단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럼 성도는 선과 악을 판단하며 살아가야 할 자로써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 죄의 들보를 날마다 빼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 눈을 가리고 있는 죄의 들보를 뺄 수 있을까요?
따라 합시다.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나의 죄의 들보를 뺄 수 있냐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율법을 철저하게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어떤 유대인보다 어떤 바리새인 보다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 자기의 의를 세워갔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다가 환상가운데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비로써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앞으로 볼 수 없게된 바울은 삼일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어둠 속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합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큰 교만이고 죄악인 줄을 깨닫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이 바로 나의 죄 때문인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죄인 중에 괴수 우두머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눈이 열려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자기 죄를 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이 바로 나의 죄때문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바울은 비로써 자기의 들보를 보게 된 것입니다. 자기의 들보를 보지 못했을 때는 그저 다른 사람의 티를 보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들보를 보고 바로 자기 자신이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때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 죄를 놓고 날마다 통곡합니다.
롬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은 자기 속에 끊임없이 솟아나는 죄가 자기를 사로잡는 것을 보게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고백하며 누가 나를 이 죄와 사망의 몸에서 건져주나하고 통곡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나는 죄의 정죄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자기 의라는 것은 없습니다. 자기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일 뿐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아무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허물과 죄를 보면 그저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길 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도 언젠가 나와 같이 예수님을 만나면 죄를 씻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가 될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살아가는 자들은 자기의 들보를 빼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제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티를 뺄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른 사람의 티를 빼는 것은 자기의 의가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그들의 티를 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당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면 당신의 모든 죄는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세요”
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자기의 티를 빼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다른 사람의 티를 빼는 자입니다. 그러려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그리스도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하는 이 귀한 복음을 개나 돼지와 같이 발로 밟아 버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도리어 우리가 찢어 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복음을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성령의 지혜를 가지고 성령의 능력으로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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