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빛으로 살라
예수님이 아침에 다시 성전에 들어오시니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듭니다. 예수님이 앉아서 무리를 가르치고 계시는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잡힌 한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합니다.
이들이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율법대로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하면 그것은 로마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정부의 허락없이 유대인들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하면 그들은 예수가 로마법을 위반하였다고 로마 정부에 고소할 것입니다. 반대로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산헤드린 공회에서 유죄를 선언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판결을 내리든지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계략에 걸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고 갑자기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십니다. 예수님이 대답을 하지 않고 딴청을 피우자 유대인들이 다그치며 대답을 재촉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일어나 대답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계속 쓰십니다.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아무도 여자에게 돌을 던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죄 없는 자는 아무도 없는 것이죠. 돌로 여자를 치려고 했던 자들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다 나가고 오직 예수님과 간음한 여자만 남습니다. 예수님이 일어나서 그 여자에게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주여 없나이다”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십니다.
3절에 간음 중에 잡히 여자 라고 기록했는데 여기서 간음 원어로 나아프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다른 남자의 아내 혹은 약혼자와의 성적 결합’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간음 중에 잡혀 온 이 여자는 남편을 둔 유부녀일 가능성이 많고 결혼을 하지 아니하였더라도 최소한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는 약혼녀인 것입니다. 이런 여자가 다른 남자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것입니다.
이런 여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세의 율법을 따르면 돌로 쳐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죽일 때는 간음한 남자와 여자를 같이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찐된 일인지 바리새인들은 간음한 남자는 잡아오지 않고 여자만 잡아 왔습니다. 어쨌든 이 여자는 죽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판결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것입니다. 이 판결은 아무도 그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없는 판결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죄 없는 자는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죠. 딱 한 사람은 돌을 던질 수 있죠? 예 예수님이죠. 예수님은 죄가 없으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판결은 죄인인 여자를 그냥 풀어주는 것이죠.
여러분 예수님의 판결은 올바른 것인가요? 그렇지 않죠.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만약 이런 식으로 판결을 하라고 하면 아무도 악을 심판할 수 없습니다. 다 죄인인데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재판관이나 검찰, 경찰들은 다 옷 벗고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 세상은 악이 활보하는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은 정욕이 끌리는 대로 마음껏 간음을 져지르고 속이고 싸우고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이 세상 질서는 다 무너지고 아비규환이 될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왜 이런 판결을 내리신 것일까요?
예수님이 이런 판결을 내리신 것은 악인을 잡지도 말고 재판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13장에 보면 도리어 이 세상의 악을 심판하라고 하나님이 세상에 권세자를 세웠음을 말씀합니다.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이 세상에 다스리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칼의 권세를 주어 그들로 악인을 심판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은 유대지도자들이 잡아 온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지 못하게 하고 풀어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먼저 유대지도자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온 것은 이 문제를 공정하게 판결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간음한 여자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아주 악한 동기가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유대인들의 위선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죄악에 대해서는 너그러우면서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는 아주 가혹하게 정죄하고 판단하려고 하는 위선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럼 유일하게 간음한 여자를 정죄하고 돌을 던질 수 있는 예수님은 왜 이 여자를 정죄하지 않고 그냥 보내주는 것일까요? 이것은 죄인에 대한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죄를 심판하는 심판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는 구원자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림으로 세상 죄를 속죄하십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조건적인 용서입니다. 누구든지, 어떤 죄를 져질렀든지 상관없습니다. 예수님께로 나오는 자는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간음한 여자는 마땅히 정죄를 받고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여자가 예수님이 아닌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갔더라면 이 여인은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가 산 것은 죄를 가지고 예수님께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속죄로 여인의 죄는 속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는 이 여인에게만 아니라 예수님에게로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은 예수님에게 나오는 모든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다 간음자들이고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조건 적인 용서로 우리의 죄가 속죄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용서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가 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줄을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우리 죄를 속죄해 주시는 것은 우리가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간음 죄에 빠져있는 자는 간음 죄를 끊고 술 취함에 빠져있는 자는 술을 끊고 거짓에 잡혀있는 자는 거짓을 끊고 탐욕에 사로잡혀있는 자는 탐욕을 끊어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예수님은 죄사함과 동시에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의 죄를 사하시며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11절 말씀 같이 읽습니다.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것은 회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가던 방향을 180도 바꾸어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대전에 사는 사람이 부산에 계신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달려가는데, 이정표가 이상합니다. 청주가 나오고 천안이 나오더니 안성, 오산 이런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럼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 빨리 방향을 거꾸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죠. 계속 그 상태로 가면 부모님하고 점점 더 멀어지는 것입니다. 방향을 거꾸로 바꾸어 부산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신 것은 이제 간음의 길을 끊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이런 돌이킴의 회개가 이루어지려면 자기가 가던 길이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가는 길이 잘못된 길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면 절대로 방향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럼 그 사람은 부모님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틀렸음을 인정하고 방향을 바꿀 때 비로써 점점 부모님하고 가까워지고 계속 가다보면 부모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이런 회개가 이루어지려면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다 잘못된 것이고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원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제는 내 마음대로 가던 길이 다 잘못된 것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이고 이렇게 될 때 그 사람은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12절에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나는 세상이 빛이라고 하신 것은 세상의 여러 빛 중에 하나의 빛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유일한 빛이심을 말씀합니다. 그럼 예수님이 세상의 유일한 빛이시라면 예수님이 없는 세상은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까? 예 세상은 어둠 속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빛이 없는 어둠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예 앞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어둠에 갇혀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둠에 갇혀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는 앞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 혼자서도 올바른 길을 잘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이죠. 나는 돈도 잘 벌고 잘 먹고 잘살고 있어, 나는 올바른 길을 잘 가고 있어, 하고 자기는 앞을 잘 보고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가는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 사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냥 어둠 속에서 계속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어 비로써 눈이 열려 앞을 볼 수 있게 될 때, 그 사람은 자기가 전에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다 어둠이었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방황했던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빛은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할 때 비로써 나에게 비추어집니다. 빛이 비추면 우리는 어둠의 감옥에서 해방을 얻고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8:32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간음하는 여인과 같은 죄인임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대로 가던 나의 모든 길이 잘못된 길이었음을 인정하십시오. 그 길은 어둠 속에서 앞을 전혀 보지하고 방황하던 길인 것입니다. 나는 올바른 길을 갈 수 없는 소경임을 인정하시고 예수그리스도께 나의 인생 전부를 맡기십시오. 앞으로는 내 마음대로 가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인도만을 따라가겠습니다 라고 뜻을 정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잘못된 길로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소경이 안내자의 손을 잡고 그대로 갈 때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듯이 예수님이 우리 손을 붙잡고 이끌어 주십니다. 이것은 잠시동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그날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12절 끝에 보시면 “나를 따르는 자는 ---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신 그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라사십시오 그럼 여려분 생명의 빛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실패할 까봐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실패할까 두려우면 조금 상황이 어려워 지면 예수님을 따르지 않게 되죠.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항상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임을 확신하십시오. 예수님을 따라가는 이 길이 목적지를 향해 가는 참 진리의 길이고 이 길이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반드시 생명으로 안전하게 인도 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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