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강의

<주일오전설교> 그리스도인의 길(마23:1-12)

박선준목사 2019. 8. 20. 18:06


그리스도인의 길


부지런히 섬김의 길

자기를 낮춤

 

우리들 마음속에는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자기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부자든 가난하든, 지식이 많든, 적든 사람들은 각자 자기를 위해 살아가느라 분주하죠.

그런데 이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온 마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인간의 마음을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람 아담에게는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다른 피조물들을 사랑하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마음은 인간의 마음이 죄로 타락하면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것을 요한일서2:16이 말씀합니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이것은 모두가 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것은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인간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꽉 차 있습니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늙어 죽을 때까지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사로 잡혀 살 뿐입니다. 더 좋은 거 먹고 싶고, 더 좋은 집에 살고 싶고, 더 많이 갖고 싶고 더 높아 지고 싶고 즐겁고 멋지고 화려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높임 받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평생을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며 살는 것이죠. 그러나 결국에는 육신의 정욕을 채우지 못합니다. 6:7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

인간의 정욕의 마음은 밑이 터진 웅덩이와 같아서 아무리 많은 물을 갖다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도리어 더 갈증만 날 뿐입니다. 또 그렇게 평생 자기 자랑을 하지만 결국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고독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세상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것은 높임을 받으셔야 할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정욕을 따라가는 길이 넓고 편하고 좋아 보여서 그 길로 가지만 그러나 그 길은 멸망의 길입니다.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길을 따라 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들입니다. 더 이 상에 썩어질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풍속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끊임없이 버려야 될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이 무슨 마음일까요?

예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입니다.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이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에 사로잡히면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섬기려는 마음이 사라지고 섬김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 집사가 될 때는 열심히 섬기려고 합니다. 교회 청소가 있으면 내가 먼저 나서서 열심히 하고 다른 궂은 일이 있으면 앞장서서 열심히 섬기려 합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면서 점점 섬김의 모습이 사라집니다. 교회 청소한다고 하면 바쁘다는 핑계대고 잘 나오지도 않고 교회에서 무슨 봉사를 한다고 하면 슬그머니 뒤로 빠지고 점점 섬김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죠. 이런 현상들이 왜 나타나냐면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 자기를 위하는 마음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나오는데요, 이 사람들이 처음에는 아주 열심히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서기관은 고대시대 때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율법을 아주 깊이 연구하며 말씀을 가르치는 제사장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는 아주 순결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언제 부터인가 변질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 1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무리와 제자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변질된 모습을 말씀 하십니다. 2절에 보시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어디에 앉아있다고 했습니까?

예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했습니다. 이 모세의 자리는 백성들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심판하고 다스리는 그런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에게 우러름을 받을 수 있는 아주 권위가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앉아서 말하는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변질 되어 있음을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만하고 행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이죠.

이 유대지도자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일반 백성들도 자기들처럼 율법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돕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교훈의 말씀을 가르치기기도 하고 자기가 말씀을 지키는데 솔선수범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게 하기 위해서 여러 규정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만약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라고 하나님의 율법이 기록되어 있으면 이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기 위해서 그들 나름대로 여러 행동세부 규정들을 정해 놓았습니다.

안식일에는 몇 발자국 이상 걸으면 안되고, 불을 피우면 안되고, 무거운 것을 들면 안되고 의복은 빨아 놓고 등등 여러 세부 규칙을 정해 놓은 것이죠. 그런데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정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을 섬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규정들은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 섬김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어 버렸고 또 백성들을 쉽게 통제하고 조정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유대지도자들이 세운 세부 규정들은 엄청나게 많고 실제로 그것들을 하나 하나 지킨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쉽게 율법을 지키도록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백성들에게 엄청난 짐이 되고 그들을 율법의 노예로 전락을 시키는 꼴이 된 것이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백성들이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가차없이 지키지 못한다고 정죄하고 비난하기만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고 그들을 도우려는 섬김의 모습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4절 읽어 봅시다.

23: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이렇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처음 섬김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비난하고 정죄하고 자기 뜻대로 조정하려고 하는 자들로 변질이 된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변질된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 들어가보면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연약한 백성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 뿐이었는데, 언제 부터인가 하나님께 영광,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사라져 버리고 오직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 권위를 강화하고 자기를 높이는데 정신이 팔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섬기는 자가 아니라 섬김을 받으려는 자들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 자기를 높이는 마음에 사로잡히면 섬김의 모습은 사라지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자로 변질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이런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마음에 빠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늘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낮고 낮은 땅에 내려오셔서 죽기까지 섬기시고 끝내는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심으로 나를 구원하셨다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구원 받은 것이 예수님의 철저한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을 기억하고 나를 높이려는 죄악된 마음 끊임없이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내가 주를 위하여 헌신을 하고 희생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나는 죄인일 뿐이며 주님 앞에 무익한 종일뿐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런 철저한 자기부인이 있어도 우리 안에는 늘 나를 높이려고 하는 죄의 본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며 섬기기 보다는 섬김을 받으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매일 우리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자기를 부인하며 섬김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 청소를 할 때 오늘도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 주님의 몸된 교회를 깨끗하게 하는 귀한 일에 사용하여 주심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열심히 섬기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다가 핍박을 당하면 나같은 죄인이 주님의 이름을 높이다가 욕먹는 것에 도리어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이죠.

섬기라고 말만하지 말고 열심히 섬기는 자가 되십시오, 다른 사람의 짐을 져주라고 말만하지 말고 먼저 내가 다른 사람의 짐을 져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라고 매일 고백하십시오. 예수님이 끝까지 섬기시고 자기를 희생하시고 자기의 전부를 내어주신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고 끝까지 섬기는 자로 살아 갈수가 있습니다.

 

또 자기를 높이는 마음에 사로잡히면 나타나는 현상은 인생의 초점이 사람에게 맞추어진다는 것입니다.

23: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경문은 그 당시 종이라고 할 수 있는 양피지 같은 것인데, 여기에 다가 하나님 말씀을 적어 놓고 그것을 둘둘말아서 조그만 박스에 넣어 이마에 붙이든가 팔목에 붙이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은 6: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이 말씀에 근거한 것인데, 그렇게 하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여 경건하려는 노력입니다. 옷술은 민15:37이하의 말씀을 근거로 한 것인데, 외투같은 옷 가장자리에 털실을 꼬아 매달아 놓는 것인데, 이런 옷술을 다는 것은 방종하는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른 음행을 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경문과 옷술은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고 경건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유대지도자들에게 그것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거룩을 드러내려는 장식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사람들에게 잘 보이게 하기 위해 경문을 넓게하고 옷술을 길게하여 사람들의 눈에 잘 띄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6,7에 보시면

23: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23: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상석에 앉고 시장에서 문안을 받고 랍비라 칭함을 받았기 때문에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석에도 누군가는 앉아야 하고 사람들이 인사를 하고 랍비라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것을 좋아하고 즐긴다는 것입니다. 상석에 앉기를 좋아하고 시장에서 사람들이 모자를 벗고 자기에게 인사하며 존경을 표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영예와 존경의 칭호를 얻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람들이 랍비라고 아버지라고 지도자라고 불러주기를 바라고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거룩함을 더욱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죠. 이것은 유대지도자들을 가식 덩어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하십니다.

23: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23: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23: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이 말은 모든 칭호를 없애버리라 그 말이 아니라 높임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으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다, 아버지는 한 분 하나님이시다. 너희의 지도자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이심을 말하는 것은 높임을 받으셔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혹시나 여러분 마음속에 사람들이 나를 높여주기를 바라고 그것을 은근히 즐기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가증스러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큰 죄악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사람의 인정을 갈망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아주 부질없는 것이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 주보 겉표지에 보시면 작은 글씨로 그런 말이 있습니다.

칭찬 받는 다고 더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니며 비난 받는다고 더 가치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난 같은 평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고전 4: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초점이 하나님에게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나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가 아닌 가 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중심을 보는 분이심을 알기에 우리는 늘 우리 마음의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돕고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도움을 주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으려는 나를 높이는 것이라면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이죠.

 

세상은 자기를 높이는데 혈안이 되어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자기를 죽이는 일을 게을리 하면 어느 순간 우리도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15:31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죄인중에 괴수들입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마땅히 높임을 받으셔야 할 하나님을 밀어내고 나를 높이려고 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한 번도 자기를 높이려 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로 다시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하기 위함이십니다.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큰 자가 되고 싶습니까? 진정으로 높아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부지런히 이웃을 섬기는 자로 사십시오. 자기를 낮추는데 온 힘을 쏟으십시오. 바로 그 사람이 가장 큰 자이고 가장 높은 자가 될 것입니다.

23: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