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강의

<2023.8.13 주일오전예배설교> 사명을 따라 살라 (갈2:1-10)

박선준목사 2023. 8. 13. 15:02

사명 따라 살라

사명을 따라 사는 자는 어떤 자인가?

진리를 수호하는 자다 비진리와 타협하지 않음

사명 안에서 하나되는 자다

 

이 세상에 쓸데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귀한 하나님의 형상들입니다. 사람이 응애하고 태어난 순간부터 존재로써 가치가 생겨납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라가면서 존재의 가치를 넘어서 각자의 가치를 발하게 됩니다. 그 자기의 가치는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감당해 나갈 때 그 가치가 발하게 됩니다. 여기서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두 글자로 줄이면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자기의 사명을 감당할 때 최고의 가치를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 자기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은 누가 주는 것일까요? 예 그것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엄마 뱃속에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아무 생각없이 그냥 창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하는 사람마다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명이 다 있습니다. 각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각자 사명을 받아서 태어나는 것이죠. 그리고 자라가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평생 그 사명을 감당하다가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로 타락하므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평생 창조주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뜻을 따라 살다가 끝나버립니다. 그럼 그 인생은 헛되고 공허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전혀 발하지 못한채 끝나버리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그 사명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을 따라 살아가는 복된 사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럼 사명을 따라 사는 자는 어떤 자일까요?

진리를 수호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반드시 진리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 진리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사람이 진리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날 때 비로써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그때서야 내가 왜 살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육적인 것만 생각합니다. 좋은 직장 가져서 돈 많이 벌고 행복하게 살아야지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명,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 나라 이런 것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소망이 없는 죄인, 그리고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길이시고 진리시고 생명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럼 그때부터 그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게 됩니다. 주님이신 예수그리스도만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 말씀인 성경 전체가 그대로 믿어집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가 예수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 말씀 전체가 그대로 믿어지게 되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다니게 되고 또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말씀을 계속 듣게 되면서 점점 하나님을 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사명을 위해 살게 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을 따라 사는 자는 진리를 수호하는 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나의 생명이고 하나님을 만나게 하여 올바른 길을 가게하는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아는 것이죠. 그래서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기의 시간과 재물과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드립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 일행은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방문 한 것은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1절에 보시면 바울이 14년 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고 했는데, 이때가 바울의 2차 방문인지, 3차 방문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예루살렘교회를 방문한 것은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4절에 보시면 2: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여기서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은 진리를 무너뜨리려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사람이 하나님 백성이 되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거짓형제들이라는 자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완전히 부정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다만 이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자기들처럼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죠. 할례를 받으면 아무 문제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같이 온 헬라인인 디도도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을 압박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5절에 보시면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다 하였습니다.

할례는 2400여년 동안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이스라엘백성이 지켜오던 전통 예식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 바울이 할례를 수용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죠. 그냥 할례를 받고 예수님 믿는 것으로 하면 다툼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누이좋고 매부좋은 것이죠.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다하고 그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왜 바울은 이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진리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가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아들이게 되면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완전히 다른 진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자유인들을 다시 율법의 종으로 만들려고 하는 악한 마귀의 궤계입니다. 이것을 간파하고 4절에 바울이 말하죠.

2: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행해야 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율법의 정죄를 늘 두려워해야 하는 무거운 노역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은 헛된 것이 되어 버립니다.

평생 복음전파를 위하여 자신의 삶을 드린 바울 같은 자들의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 되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하여 사십에 감한 매를 5번이나 맞고 태창으로 세 번 맞고 욕먹고 감옥에 갇히고 숱한 고생을 하였는데, 그 모든 것이 다 헛수고가 되는 것이죠. 정말 바울과 같이 헌신한 자들은 불쌍한 자가 되는 것이죠. 부족한 저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 일 것이구요.

그런데 바울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하시고 죽으셨는데, 만약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면 예수님은 다 이룬 것이 아니죠. 아뇨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할례를 받아야하고 성전에서 짐승의 피로 계속 제사를 드려야 하고 유월절을 지켜야 하고 예수님의 죽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이죠.

예수님이 요14:6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시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착각이었던 것이죠. 3:16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인 것인 것이죠. 예수님을 믿고 율법을 지키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고 해야 하는 것이죠.

이렇게 여러분 진리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사람의 생각을 첨가시켜 할례라는 작은 것을 받아들이면 진리 전체가 다 무너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 디도는 갈라디아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형제들의 말이 거짓임을 알리고 진리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교회까지 다시 찾아와서 공회를 열고 사도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인 디도가 할례를 받아야 형제로써 인정한다는 거짓형제들의 강한 압박을 바울은 단호하게 거부하고 디도를 억지로 할례받지 않게 합니다.

이렇게 여러분 사명을 따르는 자들은 진리의 순수성을 지키는데 있어서는 아주 단호해야 합니다. 한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한발 양보하면 이미 그것은 벌써 참된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악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된 성도들은 목숨 걸고 진리의 순수성을 지켜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을 따르는 자들은 진리의 순수성을 무너뜨리는 자들과는 결코 하나될 수 없지만 그러나 진리의 관한 문제가 아니면 누구보다도 하나되기를 힘쓰고 하나됨을 힘써 지키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과 바울 일행이 복음 안에서 서로를 인정해주고 하나되는 것을 봅니다.

바울은 먼저 유력하다하는 사도들과 자기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들에게 무슨 가르침을 받은 적도 없고 또 그들이 자기에게 어떤 의무를 더하여 준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도 하나님께 사명을 받았고 또 다른 사도들도 하나님께 사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각자 맡겨진 사명을 따라 감을 말합니다.

2: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2: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사명을 받았기에 이방인에게로 가고 다른 사도들은 할례자들의 사도로 받았기에 할례자들에게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서로 인정하면서 친교의 악수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과 사도들이 사명 안에서 하나됨을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됨은 서로를 인정해주는 다양성 속에서 하나됨을 이루는 것입니다.

바울과 사도들이 각자 사명이 다르니 각자의 길을 간다고 해서 각자 따로가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면서 합력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들은 언제든지 필요하면 진리 안에서 합력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이들은 서로를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줄 수 있는 자들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교회를 섬기다가 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빌립보교회 챙겨준 연보를 가지고 바울을 돕기 위해 로마감옥을 찾아 옵니다. 수백키로가 넘는 길을 마다하지 않고 바울을 위해 로마까지 찾아 온 것이죠.

에바브로디도는 감옥에 갇힌 바울을 위해서 온전히 헌신합니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이 도리어 병에 걸려 죽게 되는데요, 그런데 이 에바브로디도는 자기가 병들어 죽는데, 자기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를 걱정하는 것이죠.

에바브로디도가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바울을 위해 빌립보교회를 위해 자기를 내어주며 헌신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사명을 따르는 자들의 하나됨이죠. 형제 자매를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하나되어 합력하기를 원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자기의 목숨을 버리셨죠. 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명을 따르는 자들은 자기 목숨보다도 형제 자매를 사랑하며 하나되기를 힘쓰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