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강의

<2023.10.1 주일오전예배설교> 거짓성도와 참성도 (갈5:1-15)

박선준목사 2023. 10. 1. 14:40

거짓성도와 참성도

참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한 자

성령으로 사는 자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자

 

참성도와 거짓성도의 큰 차이는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참성도는 자유자입니다. 그러나 거짓성도는 종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참성도임을 믿습니다.

그럼 참성도에게 주어지는 자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든 정죄로부터 자유 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누구도 성도를 죄인이라고 정죄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성도가 잘못을 져질렀고 부족하고 연약해도 그 누구도 그를 죄인이라고 정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신 사람을 어느 누가 죄인이라고 정죄할 수 있습니까?

8:31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8: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성도가 모든 정죄로부터 자유를 얻게 된 것은 전적으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성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성도의 죄값이 모두 치루어진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못박혀 죽으신 것은 순전히 나의 죄때문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나의 모든 죄값이 치루어졌고 이제 하나님은 나를 의인이라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십니다.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은 의인이고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이며 모든 죄의 정죄에서 자유한 자유자입니다. 더이상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습니다. 율법이 정죄할 수 없는 의인이기에 죄의 심판, 형벌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자유는 훗날 마지막 심판에서 자유를 줄 뿐만아니라 우리가 사는 현실의 삶에서도 자유를 줍니다. 성도는 이제 더 이상 율법의 종이 아닙니다.

율법의 종이 아니라는 말은 율법을 잘 지켜서 즉 내가 잘해서 자기의 의를 세우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는 자는 자기를 종으로 만듭니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인정받아야지, 직장에서 일 잘해서 인정받아야지, 율법을 잘 지켜서 인정받아야지 이런 삶은 늘 자기가 잘해서 자기의 의를 세워야 하기에 율법의 종이 되버리는 것입니다. 그 삶에 자유가 없습니다. 만약 교회 안에 이런 성도가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거짓성도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자유, 평안, 기쁨 등등의 은혜를 전혀 누리지 못합니다. 겉으로 성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상 사람들처럼 자유가 없는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를 다니지 않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자유가 없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2절 서부터 이런 거짓 성도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5: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5: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할례를 행하라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은 너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임을 확증하기 위한 표이며 은혜의 상징인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4:11에 말하고 있는데

4: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을 인친 것이 할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할례를 행하는 것은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사람이라는 표시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표시를 명령하는 것은 너는 내가 택한 백성이라는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신앙을 돕는 성례로 은혜의 상징인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선생들이 할례를 자기의 의를 세우는 공적으로 이해시키고 마치 할례를 율법준수에 대한 서약식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로 율법 행위로 자기 의를 세우는 자가 돼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지옥에 떨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행위로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전혀 누리지 못하고 평생 율법의 종으로 살다가 결국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가 되어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참성도는 점점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모든 노력에서 점점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음을 알아가기 때문입니다. 감정이나 상황, 환경에 따라서 일희일비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가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점점 분명히 알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기에 자유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판 따위를 지극히 작은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바울이 고전4:3에 그랬죠.

고전 4: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이것은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자기 정체를 분명히 알아가면서 얻게 되는 자유인 것이죠. 이런 자유를 얻는 자는 세상의 모든 평판으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돈도 없는 게, 배운 것도 없는 게, 머리도 나쁜 게, 얼굴도 못생긴 게, 뚱뚱한 게, 대머리인 게 그 어떤 평판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진짜 나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내어주면서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인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나인 것입니다.

이렇게 참 성도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며 사는 자입니다.

 

그런데 참 성도가 이런 자유를 누리며 살려면 반드시 성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너는 하나님의 자녀야 하나님이 너의 아빠란다 그것을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양자의 영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하나님의 인치심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만이 예수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8:15,16절에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성령으로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임을 믿게 됨으로 우리 안에 하늘에 소망이 생겨납니다. 이 소망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늘에 속한 자임을 확신하는 가운데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을 갖게 된 자에게 할례를 받았냐, 못 받았냐 같은 율법의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단호히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며 여러분의 양심을 옭아매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빼앗으려 한다면 단호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종으로 삼으려고 하는 세상의 악한 영의 속임입니다. 이 악한 영의 속임은 아주 교묘하며 우리의 지혜로는 분별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악한 영의 속임을 분별할 수 있고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날마다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충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늘 우리를 하나님 말씀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말씀을 따라 살면 성령충만하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매를 심하게 맞고 정신을 잃은 상태로 빌립보감옥 깊은 곳에 갇힙니다. 이들이 깨어나보니 캄캄한 감옥 안입니다. 이들은 그곳에서 무엇을 했을까요? 예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들이 찬송을 부를 때에 갑자기 감옥 터가 흔들리고 감옥 문이 다 열리고 죄수들이 차고 있던 손과 발에 차꼬가 풀려버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의 역사이죠.

사도들이 담대히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공회 앞에 세웁니다. 대제사장이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 돌리고자 함이라. 그러자 베드로와 사도들이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함이 마땅하도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예수그리스도를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다 합니다.

유대인들은 사도들을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아줍니다. 그때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따라 성령충만을 받게 되고 우리는 세상이 알 수 없는 자유, 기쁨, 평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충만은 오직 참 성도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 성도는 결코 정죄를 받지 않는 자유자입니다.

그럼 성도는 어떤 행동을 해도 정죄를 받지 않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겠네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종 노릇합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종은 자기의 의를 세우려함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를 위함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한 종노릇입니다.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 또 자기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나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도 이제 나 자신을 이웃을 위해 내어주는 것입니다. 어디까지요? 내 목숨까지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의 의를 세우려고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께 인정 받으려고 절대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뿐입니다.

나의 이웃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고 자유를 누리며 산다면 나의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내어 줄 수 있는 것이죠.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잘 자라간다면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하였던 것처럼 오직 이웃이 잘되기만을 바라는 마음만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성도는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며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 성도이시죠?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자유를 가지고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고 서로 종 노릇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