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강의

<주일오전설교> 회개와 후회(마26:69-27:10)

박선준목사 2019. 4. 10. 14:27




후회하지 말고 회개하라

오늘 본문 제목은 후회하지 말고 회개하라 입니다. 후회와 회개가 비슷한 것 같지만 그러나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오늘 베드로와 가룟유다가 나오는데요, 이 두 사람이 처음에는 비슷해 보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며 예수님을 저주까지 했습니다. 닭이 울기 전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나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며 웁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은삼십을 받고 팝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는 것을 보고 가룟유다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고통스러워 합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이 아무 죄없는 분임을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아 죽게된 것이죠. 가룟유다는 죄책감 속에 몹시 괴로워합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괴로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은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후회를 한 가룟유다는 괴로워 하다가 자살을 하고 맙니다. 그러나 회개를 한 베드로는 주를 위하여 끝까지 충성을 다하다가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둘 다 자신이 한 행동을 후회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후회 한 유다는 멸망의 길을 간 것이고 회개한 베드로는 영생의 길을 간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와 후회는 좀 비슷한 것 같지만 영생과 멸망이라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그럼 회개와 후회는 무슨 차이가 있기에 이런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일 까요?

먼저는 자신의 죄를 예수님께로 가지고 가느냐 안 가느냐의 차이입니다.

후회가 멸망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후회는 자신의 죄를 예수님께로 가져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은30에 팔아넘기는 엄청난 죄악을 져질렀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길 때, 예수님이 사형을 당할 줄을 아마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큰 죄를 져지른 것도 아니기에 그저 얼마동안 감옥에 있다가 나오겠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 그런데 예수님이 사형언도를 받은 것입니다. 273절에 보시면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그랬습니다. 그의 정죄됨 이것은 이미 형이 확정되어서 공포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빌라도에게 넘겨지기 전에 산혜드린 공회에서 사형선고가 확정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체내에 사형 판결권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예수를 넘겨준 것입니다. 그러나 산헤드린공회에서 예수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273절에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여기서 보고는 주목하다, 관찰하다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가룟유다는 자신이 팔아 넘긴 예수가 어떻게 되는지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 그런데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사형선고가 내려진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가룟유다는 3년여 동안 예수님과 늘 함께 지내었기 때문이죠.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이 무슨 악을 져지르는 것을 단 한번도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사형언도가 내려진 것이죠. 예수님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지자 가룟유다는 큰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자기 때문에 아무 죄없는 예수님이 사형을 받게 되었기 때문인 것이죠.

3절에 보시면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스스로 뉘우쳐 그랬습니다. 여기서 유다는 자신의 죄에대해서 후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큰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가룟유다는 죄책감에 빠져 버립니다. 그는 이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는데요, 그래서 그는 자신이 받은 은 30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줍니다. 그러면서 27: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유다 몹시 괴로워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합니다. 그러자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네가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이 죄의 책임은 네가 당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요, 마귀의 소리입니다.

마귀는 네가 죄를 져질렀으니, 네가 죄의 책임을 지라고 합니다. 자기들이 꾀어서 죄를 짓게 해놓고서는 죄의 책임은 네가 지라는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오는 것은 오직 우리를 멸하려고 하는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죄당하고 그 죄로 말미암아 죽기를 원하는 것이 마귀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이 말을 들은 가룟유다는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버리고 물러 나옵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목매어 죽습니다. 유다는 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자살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그렇게해서 죄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파멸시키려고 하는 마귀의 철저한 속임입니다. 자살은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것보다 더 큰 죄악입니다. 죄책감 때문에 자살을 한 유다는 하나님 앞에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처럼 후회는 죄의 책임을 자기가 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의 책임을 자기가 지려고 할 때 그 사람은 절대로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죄의 문제를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가룟유다처럼 더 큰 죄악을 져지를 뿐입니다. 죄책감은 자신을 계속 정죄하게 할 뿐이고 그것이 아니면 그냥 죄를 덮어버리고 잊어 먹어버리려고 합니다. 덮어 버린 죄는 잊어먹는다고 해서 세월이 지난다고 해서 절대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죄는 그 사람 머리위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 죄의 값을 반드시 치루어야 합니다. 후회는 절대로 자신을 죄에서 자유케 해주지 못합니다. 결국은 자신을 멸망케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책임을 자기가 지려고 하는 후회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럼 하나님은 죄인들이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 까요? 예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럼 회개는 무엇일 까요?

예 자기의 죄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들입니다. 다른 사람 못되었다고 할 거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짓는 죄악들이 다 내 속에도 있습니다. 우리도 언제든지 그런 죄악을 져지를 수 있는 자들입니다.

베드로는 핍박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저주하고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맹세까지 하며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베드로와 같은 죄를 져지르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우리도 얼마든지 베드로와 같이 시련과 핍박 앞에 예수님을 부인할 수 있는 죄인들입니다.

가룟유다는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의 욕심 채우기 위해서 은30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 넘겨 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 배반한 적이 없습니까?

우리는 늘 예수님 보다는 우리의 욕심을 따라가기가 쉽상인 죄인들입니다.

예 우리는 베드로와 유다와 같이 늘 죄를 져질 수 있는 연약한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요, 우리가 무슨 죄를 져지를 것을 다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 날 밤에 닭이 울기전 세 번 자기를 부인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 것을 예수님이 모르셨을 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는 자신의 제자로 삼을 때부터 아셨습니다.

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자기를 팔자가 가룟유다임을 이미 아셨고, 가룟유다에게도 그것을 알게 해 주십니다.

26: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6: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6: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과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 것을 이미 다 아시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기 전부터 무슨 죄를 지을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무도 안보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죄를 짓더라도 하나님은 이미 아시고 그 죄의 길목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왜 기다리고 계실 까요?

예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모두가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를 지었으면 숨기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 즉시 무릎을 꿇고 회개하십시오.

그 죄를 내가 짊어지고 가려고 하면 가룟유다처럼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에 가룟유다가 자신의 죄를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왔더라면, 예수님의 피가 흐르는 십자가를 붙잡고 주님 제가 주님을 팔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세요. 하고 회개하였더라면, 예수님은 기꺼이 그의 모든 죄를 자기의 피로 깨끗하게 씻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끝까지 예수님께 나오지 않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마12장에 사함을 얻지 못하는 죄가 있다고 하십니다.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함을 얻지 못한다.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바로 회개하지 않는 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고 성령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함 얻을 수 없는 죄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진실 되게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 내가 죄인임을 실토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려고 죄의 길목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서 자기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한 대속물이셨습니다.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예수님 앞에 가지고 나오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사해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나서 밖으로나가 심히 통곡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께로 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아무말도 하지 않으시고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 하고 그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베드로는 그 이후로 평생을 주를 위하여 자신의 삶을 드리고 끝내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예수님은 이마 다 알고 계십니다. 그 분이 기다리고 계세요. 누구 누구아 회개하라 우리가 회개할 때 그 분은 기꺼이 그 분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십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회개하시어 모든 죄의 짐을 벗고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