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강의

<주일오전설교>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전9:18-27)

박선준목사 2019. 6. 19. 18:32




사람을 낚는 어부

어떻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나?

값없이 복음을 전하라 (오직 영혼구원)

모든 사람의 종이 되라 (자기 권리를 다 쓰지 말라 절제)

하늘의 상 바라보라 (날마다 자기를 쳐 복종시킴)

 

베드로는 고기를 낚는 어부였습니다. 그는 아주 잔뼈가 굵은 어부였습니다. 그는 고향이 해변 마을인 벳세다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배를 탔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형제들 친구들 대부분이 다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베드로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날 밤에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허탕을 친 베드로는 피곤한 몸으로 그물을 씻고 집에 가서 쉬려고 하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것입니다. 고기는 밤에 가서 잡아야지 낮에는 잡히질 않습니다. 더군다니 깊은 곳에서는 고기가 잘 잡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립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입니까?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서 그물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급하게 다른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배를 오게하여 고기를 배에 실는데, 두 배에 가득히 채웁니다.

이런 기적을 체험한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아래 엎드리며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 하십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베르로에게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베드로와 함께 기적을 체험한 형제 안드레에게도 한 것이고 그리고 같은 어부 출신인 세베대의 아들들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한 것입니다. 뿐 만 아니라 예수님의 12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하신 것이고, 만삭되지 못한 사도바울에게도 한 것이고 사도바울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수많은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이 사명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어떻게 했을 까요. 예 베드로가 그물과 배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이심을 믿으십니까?

여러분들이 진심으로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이심을 믿는 다면 예수님은 여러분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그렇다고 여러분 모두가 베드로처럼 생업을 버리고 전임 사역자가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삶의 초점이 사람을 낚는 것에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삶의 초점이 좀 더 잘 먹고 잘살기 위해 물고기를 잡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면, 이제는 땅에 물질이 아니라 멸망을 향해 가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에 우리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영혼의 가치는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나의 삶을 통하여 멸망을 향해 가던 영혼이 구원에 이른다면 그것보다 더 가치있는 일은 없는 것이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영혼을 위하여 살 찢고 피 흘려 죽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그 영혼을 산 것입니다. 한 영혼의 가치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그 영혼이 구원을 얻는데, 나의 삶이 쓰여 졌다는 것은 엄청나게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12:3에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빛나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평생 영혼 구원을 위하여서 헌신하였던 사도바울은 죽을 때가 다되어서 고백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면류관이 예비되었다 라고 고백합니다.

남은 생애 동안에 사람을 낚는 사명을 잘 감당하여서 별과 같이 빛나고 영원히 썩지 않는 의의면류관을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사람을 낚는 능숙한 어부가 될 수 있을 까요?

따라 합시다. 값없이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훗날 하나님께 상을 받을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무엇을 잘 했기에 하나님께 상을 받는 다고 말하는 것일 까요?

다른 것이 아니라 값없이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8--

고전 9: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내 상이 무엇이냐했는데 여기서 상은 임금, 월급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하였을 때, 그 일한 만큼 수고비를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사도바울이 하나님께 상을 받는 것은 복음을 값없이 전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 까요?

그것은 그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인하여 나에게 어떤 이득이 돌아올 지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 영혼을 구원해야겠다는 그 마음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선한목자와 삯군이 갈라지는데요, 선한목자와 삯군은 겉모습은 비슷합니다. 둘다 양을 치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선한목자는 오직 양을 위하는 마음 밖에 없습니다. 그 양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도 줄 수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삯군은 그 양을 이용하여서 자기 이득을 취하려는 자입니다. 삯군 마음속에는 진정으로 양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오직 어떻게 하면 나에게 이득이 될 까 그것부터 생각하는 자입니다. 만약에 양치는 일이 나에게 손해가 된다면 가차없이 양을 버리고 떠나갈 자입니다.

이리가 양을 잡아먹기 위해 나타나면 선한목자와 삯군이 명확히 차이가 납니다.

삯군은 양을 버리고 달아나버립니다. 그러나 선한목자는 양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피 흘리기 까지 양을 위해 싸우며 기꺼이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죠.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무슨 이득을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값없이 주신 주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것은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값도 없이 전적인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죠. 이제 우리가 세상에 나가 값없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여러 핍박과 고난을 받게 됩니다. 무시를 당하기도 하고 멸시를 받기도 하고 욕을 얻어먹기도하고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더 나아가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꺼이 가서 값없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왜요? 내가 무슨 이득을 얻으려고요? 아니죠. 오직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 영혼을 죄와 사망에서 영원한 지옥불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죽기 까지 사랑해주셨듯이 이제 내가 받은 그 예수님의 사랑으로 나의 이웃의 영혼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댓가도 바라지 않습니다. 오직 원하는 것은 그 영혼이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 그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 우리가 값없이 복음을 전할 때, 참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지고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고 인정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려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종이 된다라는 것 자유를 누를 권한이 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그 당시 참으로 자유자였습니다. 유대는 그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기에 유대인들은 모두 로마의 지배를 받는 피지배계층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 만큼은 자유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유대인이었지만 그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시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성인으로 자라는 과정에서 로마시민으로 많은 특권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부터 사도바울은 자신이 가진 모든 자유를 내려놓고 종노릇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유를 포기하고 종노릇을 하는 이유는 오직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20절부터 보시면 사도바울이 자기의 자유를 어떻게 포기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을 만날 때는 자기는 유대인과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철저히 율법을 지키는 자들로써 율법 아래에서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율법 아래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율법에서 묶인자가 아니라 율법에서 자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유대인들을 만날 때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유대인을 얻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또 반대로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을 만날 때에는 율법이 없는 자처럼 그들과 교제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율법을 지켜나가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을 만날 때는 율법에 얽메이지않고 율법을 과감하게 버리고 그 이방인들의 문화적 상황에 그대로 맞추어 살았습니다. 가령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식사를 하면 안되는데, 사도바울은 그들과 거침없이 만나서 밥을 먹을 뿐 아니라 깊은 교제를 가졌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을 얻기 위함이죠. 또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양심 때문에 먹지 못하는 약한 자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에게는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먹는다고 해서 자기가 더럽혀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기에 제물을 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약한 자들과 함께 있을 때, 자기가 그것을 자유롭게 먹으면 그것 때문에 약한 자가 시험에 들고 자기와 거리가 멀어지기에 그런 꺼림이 있는 약한자들 앞에서는 우상의 제물을 입에 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약한 자를 얻기 위함인 것이죠.

고전 8: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이렇게 사도바울은 자기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자유를 누릴 수 있지만 그 자유를 포기하고 마치 종처럼, 종이 주인에게 자신을 맞추듯이 상대방에게 자신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23절에 자기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행한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구원자가 되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세상의 종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낮은 땅에 오셔서 종의 형체를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평생 종처럼 섬기시고 그리고 끝내는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신 것이죠. 예수님은 세상을 섬기심으로 인하여 세상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 구원을 받은 자들이죠. 이제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나를 낮추지 않고 내 이득 챙기고, 자존심 세우려 하고 자기 체면 살리려하고 그럼 그 사람은 절대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없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힐 수 있습니다. 만약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일 뿐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내 안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만 있을 뿐입니다. 죽은 나에게 무슨 체면이 있고 자존심이 있습니까? 나는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비웃고 조롱하고 욕할 때, 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대할 뿐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낚는 어부는 날마다 하늘의 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늘의 상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사람을 낚는 일을 하게 끔 하는 큰 동력이 됩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온갖 고난과 수모를 당하시며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가실 수 있었던 것은 앞에 있는 기쁨때문이셨습니다. 그것을 히12:2이 말해주죠.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 하였습니다. 모든 고난을 견뎌내시고 끝내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사도들도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받고 수난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견뎌낸 것은 그들이 참여할 하늘의 영광 때문이었습니다.

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벧전 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벧전 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절대로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치열한 영적 전쟁입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영혼들을 집어 삼키려고 으르렁 거립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이 마귀의 손에 있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귀는요, 절대로 영혼들을 내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구원하려면 이 마귀를 결박시켜야 합니다.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마귀를 결박시키는 것은 결코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저한 예수그리스도의 권세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권세를 사용하려면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있으면 마귀가 비웃어 버립니다.

내가 완전히 죽고 예수그리스도만이 있을 때 마귀를 쳐 물리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수치 부끄러움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권세를 가지고 담대하게 영혼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가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죠. 마귀는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해도 안돼, 너 부끄러움을 당할 거야, 너 같은 것이, 끊임없이 나의 정욕을 부채질하며 나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낚는 복음 전파자는 날마다 자기를 쳐 복종시키며 나가야 합니다.

나를 매일 매일 부인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내가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사는 것입니다. 나는 쇠하여야 하고 예수님만 흥하여야 합니다.

운동선수들이 이기기 위해 날마다 자기를 절제하는 것처럼 복음 전파자는 날마다 자기를 쳐 복종시키며 저 하늘의 상을 바라보며 달음박질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아갈 때 사탄의 결박은 끊어지고 영혼은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 때 저와 여러분에게 하늘에 상이 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